[동아광장/김충식]‘잃어버린 10년’과 언론 탓

  • 입력 2001년 7월 6일 18시 35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나왔다. 거품경제가 꺼지고 활력을 잃은 채 신음해온 10년, 분야마다 ‘되는 일’이 없었던 10년, 허송해온 세월이라는 자탄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나간 10년은 어떨까. 잃기만 한 게 아니라 아예 버려놓은 10년은 아닐까.

91년부터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 김영삼 후보가 외친 공약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한국병’을 고쳐놓겠다, 개혁 구조조정으로 나라를 되살려 놓겠다고 했다.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YS의 ‘개혁5년’ 치적이라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였다. 일본보다 더 크게 잃고 망친 한국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권을 넘겨받은 것이 98년, 그리고 3년 남짓 정부를 이끌고 있다. 외환위기 극복, 남북관계 진전, 생색은 그럴듯하지만 국민의 가슴은 허탈할 뿐이다. 주가도 경기도 바닥이고, 공적자금은 밑빠진 독에 물 붓듯 하지만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정치는 가파른 대치의 연속이요, 피곤을 더해주는 ‘공해’일 따름이다.

정확히 10년의 망쳐놓은 세월이다. 두 김씨가 바로 그 10년을 끌고온 리더들이기에 상실감 낭패감 배신감은 여느 정권 때보다 더 깊고 씁쓸하다. 왕조도 거치고 선거제 정부도 누대를 거쳤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이 나라 역사상 드물게 자발적인 한 표를 기반으로 집권한 진짜 뽑힌 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들이기에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기대는 실망이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으로 변하고 있다. 40대기수, 민주투사, 그런 허상은 깨지고 아예 국가 경영능력조차 없었던 폴리티션들에게 속고 찍지 않았나 의심하게 된다. 인재 기용은 폭이 좁고, 개혁은 세몰이 바람몰이로 몰아붙여 우선순위를 잃고 주저앉았다.

당선 직후 잘 나갈 때는 포퓰리즘에 취해 세월보내고, 업적과 생색위주로 개혁 깃발을 내걸고 포효한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일이 안풀리고 저항이 생긴다. 그렇게 길이 막히면 언론을 탓해 왔다. 그리고 정치와 행정 경제운용의 모든 비틀림, 개혁 실패가 바로 언론의 ‘장난질’에서 비롯한다고 몰아 세우는 것이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안되어 언론사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경고했다. “대통령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생활도 없어서야 되겠느냐. 그 애 집앞에 망원렌즈를 들이대고 사진기자들이 진종일 죽치는데 당장 치워라.” 그렇게 말하는 태도는 ‘독이 올라’ 있었고 당장 완력이라도 행사할 듯 했다고 한다. 김현철 취재는 그 협박 이후 중단되었다.

YS의 자승자박이었다. 최근 ‘안기부 예산의 선거자금 불법지원’사건 재판에서도 드러난다. YS가 협박하던 시기, 김현철씨 행각이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김기섭 피고인(당시 안기부 운영차장)은 “93년께 김현철씨의 부탁으로 70억원을 안기부 계좌를 통해 돈세탁을 해준 일이 있다. 실명 전환이 안된 돈이 있다고 부탁해서…”라고 진술했다.

YS 대통령은 아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덩달아 정권도 식물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뿌린 대로 거둔 셈이다. 역사에 가정(假定)이야 없다지만, 언론이 더 집요하게 ‘소통령’을 감시하고 물고 늘어졌더라면 YS의 불행, 나아가 국가적 비극도 면해졌거나 축소되었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오늘날 세무조사의 칼을 빼든 김대중 정권도 YS정권을 답습하는 것만 같다. 정부의 개혁부진, 실책과 오류를 온통 언론에만 전가하려는 인상이다. 언론이 마땅히 져야할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으며, 거기에 최선을 다했느냐는 우리가 반성할 몫이다. 나라가 망한다면 언론이라고 잘했다는 소리가 나올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어찌 정부의 실패가 오직 언론, 그것도 몇몇 신문의 작용에서 비롯된다는 식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정권은 정권의 역할과 힘이 있고, 언론에는 언론대로 가야할 길이 있다. 그런데도 언론의 본질이요, 사명이라고 할 반대나 비판에 대해 역겨워 하고, 듣기 싫은 소리 하는 몇 신문을 천하의 ‘공적(公賊)’처럼 몰아 칼을 내리친다면 그건 정권의 도리가 아니다. 언론의 힘을 빌려 강권독재에 맞서 성장하고, 마침내 권좌에 오른 인간으로서의 도리도 아니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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