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영언/저주

  • 입력 2001년 6월 28일 18시 58분


사극(史劇) 붐이다. ‘태조왕건’ ‘여인천하’ ‘명성황후’ ‘홍국영’ 등 4편이 요즘 밤시간대 시청자를 붙잡고 있다. 이들 사극에는 궁중 여인들의 암투 장면이 많다. 여인들은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신의 소생을 보위(寶位)에 앉히기 위해 갖가지 흉계를 꾸민다. 이 중 하나가 상대 여인에 대한 ‘저주(詛呪)’다. 무엇인가 주술적인 행동을 통해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란다. 세자를 저주하기 위해 후궁이 죽은 쥐를 나무에 매달았다는 등 저주를 역으로 이용해 상대를 치기도 한다.

▷이 같은 저주가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한나라당 권철현(權哲賢) 대변인은 이회창(李會昌) 총재를 ‘타락한 주류’라고 비난한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상임고문에게 반격의 화살을 날렸다. 그는 노 고문을 향해 “국운이 있다면 이 총재가 정권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등의 발언을 노씨가 했는데 이는 과거 장희빈(張禧嬪)이 한 짓과 같은 저주에 다름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노씨의 발언을 이 총재가 정권을 잡을 수 없도록 빌고 바라는 일종의 저주로 간주한 것 같다.

▷권 대변인이 적절한 용어를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정치판을 보면 저주가 판치던 옛 궁중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듯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사사건건 부닥치는 여야의 모습과 험악한 말들 속에서 저쪽이 죽어야 우리가 산다는 살기가 느껴진다. 마치 해괴한 물건을 만들어 땅에 묻고 이상한 주문을 외는 것만 같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민의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저주도 깊어만 간다.

▷그뿐인가. 노사간, 보혁간, 지역간 서로가 서로를 저주한다. 그러다가 조그만 꼬투리 하나만 붙잡으면 침소봉대해 공격하고 무너뜨린다. 우리 사회의 고질인 음해 음모 투서 등도 따지고 보면 잘 나가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현대판 저주’다. 이는 공정한 경쟁 분위기를 해치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다. 300여년 전 죽었던 장희빈이 다시 살아 돌아온 듯 세상이 너무 삭막한 것만 같다.

<송영언논설위원>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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