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환자의 비밀' 어디까지 지켜야 하나

  • 입력 2001년 6월 18일 18시 43분


의사는 환자의 비밀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가.

개그우먼 이영자씨(34)와 서울 강남의 성형외과 원장 K씨가 벌인 ‘다이어트 파동’은 진료를 통해 환자의 비밀을 알게 된 의사가 이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새로운 법적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우리 법은 의사의 비밀누설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 조항이 의사에게 적용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관련 법규정〓의사의 환자 비밀 누설을 처벌하는 법 조항은 형법 317조의 ‘업무상 비밀누설’과 의료법 19조와 67조의 ‘비밀누설의 금지’ 조항. 또 의료법 52조는 비밀누설로 처벌받은 의사는 의사 자격을 박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씨의 변호인인 법무법인 ‘지평’의 김성수(金性洙)변호사는 18일 “의사가 환자의 비밀을 지키지 못하면 신뢰가 확보될 수 없고 신뢰 없이는 좋은 치료가 어렵기 때문에 비밀유지는 법률적 의무이기 이전에 도덕과 의료 윤리에 속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환자의 동의 없이 비밀을 공개할 수 있는 경우로는 △법원의 명령(진료기록 제출명령이나 증거보전절차)이 있는 때 △법률상 신고의무가 부가된 때(공중보건을 해칠 수 있는 법정전염병 환자나 마약사용자의 발견 등)로 제한된다.

▽양측의 주장〓이씨의 지방흡입수술 사실을 언론에 공개한 K씨의 행위가 ‘비밀누설’에 해당한다는 데에는 양측이 모두 동의하고 있다.

이씨는 8일 K씨를 의료법위반 등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으며 검찰이 K씨를 기소하는 경우 첫 사법처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K씨측은 이씨의 수술 사실을 공개한 행위는 위법성이 없는 ‘정당행위’에 해당하므로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형법 20조에서 사회상규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K씨의 변호인인 법무법인 ‘김장리’의 도진석(都鎭錫)변호사는 18일 “의사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일”이라고 맞섰다. K씨는 5일 폭행혐의 등으로 이씨를 검찰에 고소한 상태.

도변호사는 이씨측이 먼저 K씨 측에 폭력을 행사했으며 의사로서의 자격을 폄하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했다. 또 유명 연예인인 이씨가 100% 운동으로 살을 뺐다고 언론을 통해 거짓말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공익’에도 도움이 됐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사례〓76년 ‘테라소프 판결’은 환자의 비밀유지보다는 타인의 이익이 우선하는 경우를 규정한 대표적인 사례. 캘리포니아대학 병원의 한 임상병리사는 이 병원에서 치료중이던 한 남학생에게서 “변심한 애인 테라소프를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 이를 병원측에 보고했다. 그러나 병원측은 이 보고를 묵살하고 남학생을 퇴원시켰다.

이후 실제로 테라소프가 살해되자 가족들은 이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법원은 학교측에 배상을 명령했다. 어떤 사람에게 사망과 같은 중대한 신체적 손상을 가져올 수 있는 경우와 같이 중요한 공익상의 이유가 있다면 의사는 환자의 비밀을 공개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는 것.

그러나 이 판례는 특정한 타인에게 위험이 발생할 ‘합리적 예견가능성이 명백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씨 사건에 적용하기는 힘들다고 법조계는 보고 있다.

<신석호·이정은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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