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해갈의 국민정서

  • 입력 2001년 6월 18일 18시 26분


오랜만에 단비가 내려 먼지가 풀썩이던 대지를 촉촉이 적신다. 시들어가던 논밭 작물은 초록빛이 짙어지면서 생기가 돈다. 비를 반기는 이가 어디 농부뿐이랴. 90년만의 가뭄이 지속되자 농사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즐거운 놀이를 삼가고 농촌돕기 성금 대열에 합류했다. 반면에 가뭄 속에 골프를 친 공직자들은 매서운 질타를 당했다. 농민이 전체 국민의 9% 가량으로 줄었지만 가뭄을 대하는 국민정서는 농촌 인구가 8할을 넘던 60년대 이전이나 다름없다.

▷민노총과 산하 노조들은 가뭄 속에 연대파업을 벌이다 여론의 매를 맞았다.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은 헌법과 노동관련법에 보장된 근로자들의 권리이다. 이래서 헌법과 법률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는 말도 나온다. 골프장들은 물이 모자라 잔디가 빨갛게 타들어가는데도 지하수를 뽑아 쓰려면 인근 농민들의 정서를 살펴야 했다. 18홀 규모 골프장에는 캐디와 잡초를 뽑는 일용직 등 200여명의 삶이 매달려 있으니 논밭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터인데도….

▷고급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은 국민정서의 눈총을 받는다. 한국은 작년에 자동차를 167만대 수출하고 고작 4600여대를 수입했다. 이런 불균형이 지속되다가는 미국과 유럽연합으로부터 무역보복을 당하기 쉽다. 호화주택을 두들기는 것이 서민 정서에 부합할지 모르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고급빌라나 아파트가 팔려야 건설회사가 돌아가고 근로자의 일자리가 유지된다. 생선회에 금가루를 발라주는 고급 일식집의 매출이 늘어나야 어민의 소득이 느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다수 집단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국민정서가 항상 절대 진리는 아니다. 세월의 검증을 거치고 나서는 오류로 판명되기도 한다. 일종의 집단 논리라고 할 수 있는 국민정서가 강조되다 보면 개인의 권리가 왜소해질 수 있다. 국민정서를 당대의 민심 또는 여론이라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정서를 외면하는 정부와 정치인은 성공하기 어렵다. 여러 부문에서 갈등을 노출했던 가뭄의 국민정서도 이번 단비로 해갈(解渴)이 됐으면 좋겠다.

<황호택논설위원>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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