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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5월 30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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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9단(26)은 인터뷰하기 까다로운 스타일이다. 말이 별로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질문을 하면 ‘A면 A’, ‘B면 B’라고 확실하게 대답해줘야 하는데 ‘그게 A인 것 같기도 하고 B인 것 같기도 하고…’라는 식으로 말끝을 흐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
사진 찍을 때도 웃는 법이 없다. 무덤덤한 표정, 그 자체. 웃기는 소릴 해도 좀처럼 웃지 않는다. 그래서 질문을 잘 던져야 하고 대답 속에 담겨있는 ‘행간의 의미’도 잘 파악해야 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절묘한 타이밍에 셔터를 눌러야 한다. 물론 실패할 확률이 많긴 하지만.
따사로운 봄볕을 내리쬐는 29일 오전 서울 광화문 대한성공회 뒤뜰에서 그를 만났다. 이 9단은 이날 LG배 세계기왕전 시상식이 있어 오랜만에 진회색 양복을 입고 나왔다. 하지만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이 9단의 명성(?)을 익히 아는 터라 가벼운 질문부터 던져봤다.
-LG배 세계기왕전을 획득한 소감은.
“처음엔 나이어린 도전자와 둬서 당황했습니다. 처음에 2판을 연달아 지고 나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노력했고….”
이 9단은 이번 결승전의 고비가 된 세번째 판에서 졌다고 체념하고 있었지만 막판에 이세돌 3단이 ‘평소 기풍’과는 전혀 다른 안이한 수를 두는 바람에 간신히 역전했다고 한다.
-이 3단의 ‘평소 기풍’은 어떻다고 생각해요.
“수읽기가 빠르고 실력 자체가 만만찮아요. 조금만 더 다듬으면 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자세히 얘기해주면 좋으련만’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느 면을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경험같은 거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봤다.
-이 3단과 조훈현 9단의 기풍이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비슷한 점도 있는데 좀 달라요. 이 3단과 아직 많이 둬보지 않아 잘 모르겠어요.”
LG배 우승하기 전에 그는 ‘슬럼프’에 빠진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바둑이 싫어진 것 아니냐’부터 심지어 ‘이창호의 몰락이 시작됐다’까지 여러 추측들이 난무했다.
-이달초 후지쓰배에서 무명에 가까운 이시다 쿠니오 9단에게 지는 등 부진했는데.
“글쎄요, 제가 설렁설렁 두다가 패한 것도 아니고 내용적으로 완패했어요. 그만큼 세계 바둑기사들의 층이 두텁다는 거죠. 적어도 세계대회에 나올 정도면 무명이라도 나름대로 실력이 있다고 봐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부진하다기보단 그 쪽이 잘뒀다고 인정해줘야죠.”
그동안 ‘슬럼프’ ‘몰락’ 등을 운운했던 바깥 여론이 야속해서일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만큼은 예상보다 길고 자세히 답변했다.
-그럼, 이 9단은 지금 슬럼프가 아니라고 느끼시는 거죠.
“(한참 뜸을 들이다가)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금방 말을 잇지 못한다.
-하여간 최근 바둑이 뜻대로 잘 안풀린다는 생각이 드나요.
“(역시 한 템포 쉬고) 뜻대로 잘 안풀려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요.”
그는 최근 세상 사는 법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세상 사는데 기본적인 것을 많이 모른다는 생각이 든단다.
운전 면허도 따고 싶고 일본어도 공부해야겠고 등등.
-뭘 제일 먼저 하고 싶나요.
“아직 말하기 힘들어요. 머리속 생각을 막바로 행동에 옮기는 성격이 아니고 게으른 편이라서. 실제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여자 친구는 있어요.
“….”
-주위에선 사랑 한번 못해본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던데요.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그거야 생각하는 사람 마음이겠죠.”
기자로선 속터지는 인터뷰였지만 바로 이런 조심성과 신중함이 그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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