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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5월 6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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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교착 미국 탓만 해서야▼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대미 강경 발언과 위협을 서슴지 않던 북한이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을 적으로 보지 않는다”거나 미국이 우려하는 미사일 발사를 2003년까지 유예하겠다고 밝히는 등 유화 제스처를 보였다. 우리 정부의 최대 관심사인 김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에 대해서도 “답방 의지는 변함 없지만 시기는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겠다”고 하여 미국에 달린 문제라는 점을 강력히 시사했다.
한마디로 김 위원장이 생각하는 최우선 과제는 대미협상이며, 남북대화는 부차적인 셈이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경으로 반전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함께, 대미협상을 통해 한반도의 현상 변화를 도모한다는 북한의 기존전략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북한의 태도를 볼 때 당분간 남북관계는 소강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비록 1박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EU 대표단은 이번 방북을 통해 절제되고 균형잡힌 외교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특히 우리의 입장에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첫째, 페르손 총리는 이번 방북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한반도에서 미국을 대체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유럽의 대북외교가 냉정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런 현실인식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대두되고 있는 남북문제 해결에 있어 ‘민족중심적’ 접근이나 중국, 러시아 및 유럽 등의 역할을 강조하는 ‘균형외교’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 과연 누가 실질적으로 기여할 의사와 능력을 갖고 있는가이며 우리는 이에 대해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페르손 총리의 방북에 관해 우리 정부는 미국과 긴밀히 협의했을 줄 믿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런 식의 중재외교는 미국에 대한 압박으로 비쳐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 소지가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둘째, 페르손 총리는 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미국의 태도에 상관없이 자주적으로 남북회담에 나설 것을 촉구함으로써 모든 것이 미국에 달렸다는 북한의 입장과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북―미관계나 남북관계의 교착이 모두 미국 때문이며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비롯한 남북관계 진전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달려있다는 시각이 우리 사회에도 최근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정확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남북관계가 북―미관계에 종속돼야 할 이유는 없으며, 북한이 남북대화에 진지하게 나서면 북한이 바라는 대미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양보 아니면 파국' 사고 벗자▼
셋째, 페르손 총리가 김 위원장에게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향후 유럽과 북한이 인권문제를 협의하기로 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이런 합의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이를 위배하거나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경우 북한과 유럽관계는 적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인권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북한에 대해 정면으로 인권문제를 제기한 유럽의 태도는 북한의 인권 논의를 사실상 금기시하는 우리와는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남북대화에서 우리가 분명히 유념해야 할 것은 북한의 비위를 맞추고 양보해야만 관계가 개선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파국이 온다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도 대화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서면 언짢은 소리도 감수하면서 대화에 나서는 만큼,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보다는 상대로 하여금 대화와 협상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페르손 총리의 방북외교는 같은 시기에 터져 나온 김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의 일본 불법입국 및 추방사건으로 빛이 바래고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중재외교도 북한 스스로의 변화 없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백 진 현(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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