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훈/李수석 또…

  • 입력 2001년 2월 22일 18시 50분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늘 은유적이며 우회적인 어법을 쓴다. 그의 말에서 단정적 표현을 찾기란 쉽지 않다. 미국 재무장관의 문법도 모호하고 불투명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의 말 한마디가 시장이나 미국 경제 전반에 미칠 충격을 염려해서다.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21일 서울이코노미스트클럽이 주최한 조찬회에서 “금명간 새로운 은행간 합병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간 합병이란 일이 완전히 성사되기 전까지는 극소수의 핵심 관계자만 알 수 있는 사안. 협상 과정에서 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에는 해당 기업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자칫하면 합병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합병을 일컬어 ‘발단 전개 절정 부분을 모두 잘라먹고 결말만 존재하는 괴상한 드라마’라고 한다.

이 수석의 발언은 정부가 또 다른 은행간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미로 시장에 받아들여졌다. 은행들은 큰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일제히 이를 부인하고 나섰다. 이날 열린 ‘금융기관 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도 이 수석의 발언이 단연 화제였다.

진념(陳稔) 경제부총리는 이 수석 발언의 진위를 묻는 질문에 공자 말씀을 인용해 답했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을 논하지 말라(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자왈 부재기위 불모기정).’ 그런 말을 할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의 신중하지 못한 언행을 지적한 것이다.

이 수석의 말실수는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말 신용금고 업계 전반이 위기감에 휩싸여있을 때 “신용금고 사고가 한두 곳 더 있다”고 말해 걷잡을 수 없는 예금 인출 사태를 불러오기도 했다. 당시 당국이 재빨리 수습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신용공황으로 번졌으리라는 관측이 많았다.

삼사일언(三思一言)이란 말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격언이다. 고위 관료의 실언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받아들이기엔 우리 금융 환경이 아직 너무도 취약하다.

<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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