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시고니위버의 진실

  • 입력 2001년 1월 29일 18시 40분


<죽음과 소녀> (로만 폴란스키 감독, 1995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시고니위버의 진실’(원제 죽음과 소녀)은 군사독재의 아픈 경험을 공유하는 나라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밀실에서 자행되었던 잔혹한 과거를 법정에서 심판하는 작업은 용이하지 않다. 극단적인 무법상태에서 처참하게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는 미온적인 사법절차를 통해 구악을 응징할 수 없다고 믿기 십상이다.

▼성고문 범인 응징나서▼

남미의 익명의 나라를 무대로 한 이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단 세 사람의 인물이 등장한다. 전편을 통해 팽팽한 심리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과도기에 선 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파헤치는 수작이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지하 학생운동을 주도한 제라르도는 새로 출범하는 민간정부의 요직에 기용된다. 과거 정권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을 조사하기 위해 신설한 인권위원회의 장으로 임명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지이자 애인을 지키기 위해 모진 고문을 견디어 낸 아내 폴린은 그런 남편이 불만이다. 그처럼 영광된 조국을 갈망했던 그녀는 아직도 구악(舊惡)이 엄연히 살아있는 정치적 상황을 신뢰할 수 없다.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면서 고립 속에 일상을 살고 있는 그녀는 어느날 폭우 속에 귀가하는 남편을 도와준 미란다가 자신을 성고문한 범인임을 알게 된다. 목소리, 체취, 용어와 함께 그의 자동차에서 발견한 음악 테입이 확신을 가중시킨다. 자신은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14차례나 강간당하는 동안 가해자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배경음악으로 즐겼던 것이다.

폴리나는 미란다를 권총으로 위협하여 자기 스스로 만든 법정에 세운다. 인권과 이성적 법률을 신봉하는 제라도가 설득에 나서지만 허사다.

제라도에게는 폴리나를 유린한 사법제도가 불의(不義)이듯이 피해자의 사적 기준에 의해 설립된 캥거루 법정 또한 불의인 것이다. 영화는 혐의자와 피해자,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권법률가 사이에 벌어지는 법적 논쟁과 그 이면에 숨은 인간의 본성과 시대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많은 상황증거가 미란다가 문제의 잔혹행위의 범인임을 암시해 주지만 확증은 없다. 몇 차례의 반전의 계기도 무산되고 폴린은 미란다를 처형하는 최종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시종일관 완강하게 범행을 부정하고 알리바이마저 완벽하게 갖추었던 미란다가 마지막 순간에 유죄를 자백한다. 절박한 심문과 논쟁과정에서 암울한 시대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서 무의식중에 자신도 시대의 공범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들은 폴린이 미란다를 풀어주는 것으로 영화는 종결된다.

▼범행 자백하자 풀어줘▼

암울한 시절에 일어난 수많은 의문사의 하나도 속시원하게 진상을 밝히기는커녕,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권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던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을 두고 3년동안 설전만 되풀이하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이 무언가 강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영화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법과 영화 사이의 상세한 전문은 동아닷컴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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