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오슬로행 비행기 안에서

  • 입력 2000년 12월 6일 18시 30분


내일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큰 상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평화상을 받으러 간다. 가는 대통령이나 보내는 국민이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날이다. 그러나 지금 나라 분위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으니 안타깝다.

정부와 청와대는 노벨상 수상이 큰 경사지만 요즘의 어려운 나라 사정과 민심을 고려해 경축행사를 자제키로 했다고 한다. 김대통령은 오슬로행(行) 비행기 안에서 여러 생각을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을 통해 들은 이른바 난국수습책을 되새기며 최상의 해법이 무엇인지 고심할 것이다. 그러나 해법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나라 사정이, 민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원인이 무엇이고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솔직한 자세로 묻는 것이다.

▼'제2의 김현철사태' 예고▼

대통령 자신의 철저한 원인 분석이 선행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해법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우리 민족은 저력이 있고 어떤 위기도 극복해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번 IMF위기 때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까지 벌이며 어려움을 이겨낸 예를 든다.

그러나 대통령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때와 지금은 비슷한 점이 많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어려운 가운데도 꿈과 기대가 있었다. 사상 첫 민주적 정권교체로 탄생한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 경제를 아는 ‘준비된 대통령’에 거는 희망이 있었기에 국민적 저력이 발휘된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 국민이 꿈을 잃었다. 금반지를 빼주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IMF위기를 극복하고 나니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됐다는 원망이 국민정서 밑바닥에 깔려 있다.

20, 30대 젊은 사장들의 돈놀음이 가관이다. 수백억 수천억원이나 불법대출을 받았다고 해서 수사를 한다고 난리지만 속시원하게 풀리는 게 없다. 숱한 의혹사건마다 권력실세의 머리카락이 보일 듯 말 듯하다 만다. 마침내 집권여당 최고위원의 입에서 각종 비리의혹에 대한 얘기와 함께 ‘제2의 김현철’사태를 예고하는 말까지 나왔다.

그동안 민주당 내에서 총재와 최고위원들간의 의사소통이 얼마나 안됐으면 특별히 날을 잡아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고서야, 그것도 벼르고 별러서야 할 소리를 좀 하는 정도니 당내 민주화란 먼 얘기인 것 같다. 정동영(鄭東泳)최고위원이 말했다는 권노갑(權魯甲)최고위원의 각종 비리의혹 연루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중에 나돌던 얘기다.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얘기를 놓고 못할 소리라도 한 것처럼 당내가 소란스럽다니 우스운 일이다.

▼등돌리는 민주화 동지들▼

민주당 김경재(金景梓)의원의 말대로 이 정권은 수십년 엄혹한 군사독재 아래서 눈물과 피를 흘리며 싸워 세운 정권이다. 김대통령의 이번 노벨상 수상 공적도 반독재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가장 큰 몫이다. 그런데 그 김대통령이 박정희(朴正熙)대통령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으로 있으면서 기념관 건립에 200억원의 국고지원까지 해준다니 될 말이냐고 옛 민주화동지들은 안타까워한다. 동지들은 김대통령에게 명예회장직 사퇴를 줄기차게 호소하지만 대통령은 꿈쩍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김대통령의 독선과 오만이라며 상당수 동지들은 등을 돌린다.

민주화동지들뿐만 아니라 김대통령의 소리 없는 지지자들도 많이 돌아섰다. 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집권 초반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80%를 넘었으나 지금은 30%대로 뚝 떨어졌다. 많은 국민이 김대통령을 지지했다가 지금은 그것을 철회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공허감이다.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철회했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를 지지하기도 쉽지 않은 사람들, 이들의 정치적 허무감을 어떻게 달래주고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이것이 김대통령과 민주당이 고민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일찍이 장자(莊子)는 말했다. 정치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위기의 수습책은 머리를 굴려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정략과 욕심을 버린 빈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닐까.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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