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DJ의 결단

  • 입력 2000년 12월 4일 18시 28분


국정의 폐단을 없애고 새롭게 하려면 반성부터 해야 한다. 겉치레 반성이어서는 안된다. 민주당 김근태(金槿泰)최고위원의 말마따나 ‘집권당과 정부의 자기희생’이 따르는 반성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자기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러저러한 경우 나라와 국민보다 권력과 정파이익을 앞세웠으며, 때로 오만과 독선으로 눈과 귀가 가려져 있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자기고백과 자기희생을 통해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쇄신의 약발’이 듣기 어렵다.

지난 토요일 저녁 청와대에서 민주당 총재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당 최고위원들이 모처럼 자리를 함께 했는데, 참석자들 거의가 반주로 나온 포도주에 선뜻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였다고 한다. 회의에서 나온 얘기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다물기로 했다는 ‘함구령’은 이상하지만, 아무튼 잔뜩 벼르고 들어갔다가도 ‘어른 말씀’만 듣고 나오던 종래와는 달리 ‘충격적인 발언’까지 나온 모양이다. 민주당 총재특보단도 어제 국정쇄신책을 건의했다고 하니 이제 남은 것은 김대통령의 결단이다.

▼‘지역당 총재’ 벗어나야▼

문제는 결단의 시기와 폭이다. 지난 주 필자와 만난 한나라당 김덕룡(金德龍)의원은 “DJ가 늦어도 내년 1월까지는 당적을 버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말 그대로 국정쇄신을 하려면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의원의 말은 야당측의 ‘정략적 주장’이 아니겠느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김의원은 현재의 지역당 체제로는 야당이 권력을 잡더라도 근본적인 정치개혁이나 국가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야(與野) 정치판의 지형(地形)이 바뀌어야 하며, DJ의 당적 이탈이 그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단히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국민의 정부’는 국민통합에 실패했다. 크고 작은 책임이 어디에 있든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그렇듯이 집권여당인 민주당도 지역당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DJ가 지역당 총재로서 다른 지역당인 야당 총재와 다투고 있는 형국이다. 더구나 상대가 다수이다 보니 사정은 자꾸 고약하게 꼬여간다. 숫자싸움에 붙들려 자민련과의 모양새 흉한 공조를 계속해야 하고, 국회법 날치기에 이어 검찰 수뇌부에 대한 탄핵안을 실력저지하는 반(反)의회적 행태마저 보이게 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DJ의 세계적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DJ가 굳이 민주당 총재직을 맡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대통령중심제에서 국정을 책임지려면 불가피하다고? DJ가 당을 떠나면 ‘통제불능사태’가 올지도 모른다고? 글쎄, 그럴지 의문이다. DJ가 대통령으로서 여야의 협조를 구하고, 국민의 이해와 도움을 청할 때 국정이 지금처럼 쇄신해야할 위기를 맞는다고 할 수 있는가. DJ가 지금의 민주당을 떠난다고 당이 DJ에게 등을 돌려 통제가 불가능해지리라고 누가 믿겠는가. 그런 주장은 대체로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득권자나 일부 측근들이 대통령 듣기 좋으라고 하는 입에 발린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성공한 대통령’ 돼야 하는 이유▼

거듭 말하지만 DJ는 약속했던 대로 민주당 총재직을 내놓는 것이 좋다. 지역당 총재라는 비판을 벗어나 큰 틀에서 남은 임기 동안의 소임을 다 해야 한다. 그러면 줄곧 우려해온 야당의 ‘발목잡기’도 힘을 잃을 것이다. 대통령이 정파를 떠나 사심(私心)없이 국정을 운영하고 국민 지지를 얻는다면 오히려 여야의 ‘충성경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구차스러운 ‘DJP 공조의 덫’에서 해방돼 개혁다운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내각의 보다 넓은 인물 충원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국정쇄신의 큰 그림이 아니겠는가.

DJ는 ‘성공한 대통령’이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DJ 개인이나 특정정파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랜 세월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이들에 대한 도덕적 책무이자 민주화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YS에 이어 DJ마저 실패한다면 ‘민주화의 허무주의’만 남는 것은 아닐지 두렵다. 지금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갈림길이다. 이것저것 재고, 여기저기 둘러볼 여유가 없다. 버려서 얻는 대승적 결단이 요구될 때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