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김미현/참된 ‘안티’를 위하여

  • 입력 2000년 11월 28일 18시 38분


시인 김수영은 말한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고. ‘무수(無數)한 반동(反動)’들이 만들어가는 ‘거대한 뿌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말은 진정한 ‘반동’이 되지 못하고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서 옹졸하게 반항하는 자신에 대한 엄정한 자아비판으로 읽힌다. 김수영은 제대로 된 ‘반동’이 얼마나 힘든지를 안 것이다.

현재 가장 많은 분개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안티 문화’일 것이다. ‘비판은 아무리 더러운 비판이라도 좋다’는 듯 그 종류와 수위가 사뭇 다양하다.

안티 미스코리아에서 안티 김희선까지, 안티 ‘단적비연수’에서 안티 초고속통신망까지, 안티 러브호텔에서 안티 청와대까지 그 넓은 범위를 아우르며 성역 없는 비판이나 소비적인 욕설을 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안티 문화를 통해 ‘사이버 아크로폴리스’와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를 동시에 방문하게 된다.

▼'남 죽이기' 판치는 안티사이트▼

이런 안티 사이트가 없으면 진정한 스타가 아님을 증명해 준 서태지나 H.O.T.의 팬들이 최근에 구설수에 올랐다. 안티 서태지 공연에서는 서태지를 본뜬 인형의 배를 가르거나 주먹으로 친다. ‘서태지를 죽여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안티 서태지 운동을 보도한 방송 프로의 편파성을 문제삼아 그 프로의 방송 광고를 중단시키는 ‘압력’을 행사한다.

또 H.O.T.의 멤버인 강타가 음주운전으로 불구속 입건되자 한쪽에서는 ‘인기인만 봐주냐’고 항의한다. 다른 쪽에서는 ‘음주운전이 뭐가 죄냐’라며 옹호한다.

이전에는 할 말을 하지 못해서 억울했다. 그러나 지금은 할 말을 너무 쉽게 할 수 있어서 문제가 된다. 이제는 ‘억압’이 아니라 ‘자유’ 때문에 고통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노예로 사는 것보다 주인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고, 서로가 주인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같이 살기는 더 어려운 법이니까.

우리의 안티 문화는 ‘죽이기’의 문화이다. 자신과 다르면 무조건 적이 되는 ‘배제’와 ‘거부’의 문화이다. 그래서 싸워야 할 적이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싸워야 할 적이 너무 많아진 시대에 살게 한다. 자신이 잘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고 상대방을 흠집내서 이기려 한다. ‘아니면 말고’나 ‘그냥’, ‘잘 모르겠지만’식의 무책임한 담론이 판치기 때문에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싫음’이 더 중요하다.

물론 이런 진창 속에서도 연꽃은 핀다. ‘문화 대통령’답게 서태지는 유일하게 팬이 그만을 위해 만들어준 온라인 신문 ‘태지일보’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트가 감동적인 것은 서태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건전한 비판까지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서태지는 100이 아니라 80이다. 나머지 20을 채워줄 그런 따가운 비판을 나에게 보내달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팬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서태지는 행복한 스타이다.

진정한 비판이란 이처럼 그 당사자를 화나게 하지 않고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슬프게 하지 않고 아프게 하는 것이다. ‘너 죽고 나 죽자’라며 덤비지 않고 ‘너도 살고 나도 살자’라며 손을 내미는 것이다. 자신이 해주고 싶은 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듯이, 자신에게 잘못한 점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것을 지적해주는 것이 참된 비판이다.

▼상대 배려하는게 진정한 비판▼

하성란의 소설 ‘루빈의 술잔’에 나오듯이 깡통따개는 중심에서 가장 먼 가장자리를 돌지만 그것이 깡통 뚜껑을 따는 최선의 방법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안티 자체가 아니라 안티에 대한 안티, 안티를 반대하는 안티를 문제삼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원터치 캔’ 같은 안티 문화에 피로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비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할 정도로 도덕적 황폐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도그마를 피하려다가 딜레마에 빠져서는 안된다. 김수영도 안티에 지친 우리가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서 안티를 비판하려는 것을 많이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다.

김 미 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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