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의 바둑세상만사]정치, 바둑처럼 위기관리 잘해야

  • 입력 2000년 11월 27일 10시 17분


바둑 한판을 두노라면 적어도 100수에서 150수 가까이 돌을 놓아야 한다. 때로는 초반에 바둑을 그르쳐 단명국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바둑판 위에 돌이 거의 다 놓일 때까지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바둑판에는 361곳의 착수점이 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쌍방이 360수 가까이 둘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집이 생기는 것을 감안해야 하므로 실제 대국에서는 200~250여수 사이에 끝나는 대국이 가장 흔해 보인다. 간혹 패라도 나면 300수가 넘는 장기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어떻든 바둑 한판을 대장정에, 마라톤에, 사람의 일생에 종종 비유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바둑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포석에서는 설계도를 그리듯이 차분히 밑그림을 짜야하고, 중반전투에서는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고, 끝내기에서는 한집 두집을 세어가며 자린고비 같이 굴어야 한다. 100m 달리기처럼, 시작하자마자 10초만에 끝나버리는 게임이 아니므로, 앞날에 대비해 저축도 해야 하고 때론 복병이 무서워 지름길을 놔두고 우회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니 바둑에도 당연히 고비가 있기 마련이다. 처음엔 바둑이 좋아보였는데 어느새 불리해져 있는가 하면, 다 진 바둑을 요행으로 뒤집기도 한다. 승부가 엎치락 뒤치락 한다.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우세해서 무난히 승리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언제 어디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기에 바둑에서는 형세판단과 위기관리 능력이 아주 중요하다.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은 대국 도중에 기보를 달래서는 이를 반대로 뒤집어 상대편 위치에서 훑어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행위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승부사가 자기 바둑을 객관적인 입장으로 형세판단하는 것을 나무라기는 어렵다고 본다.

바둑판에만 코를 박고 있으면 부분에 집착하기 쉬우므로 가끔은 멀찌감치 떨어져 형세를 관망해야 한다. 바둑을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한참 두고 나서야 '내가 무얼 둔거야' 이러면 곤란하다. 여기가 고비이다 싶으면 형세판단을 해야 한다. 형세가 유리하면 조금 양보하더라도 쉬운 길로 알기 쉽게 마무리하고, 형세가 불리하면 어디에선가 빌미를 잡아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상대가 승부수를 던져오면 이를 잘 막아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쳐야 비로서 바둑 한판이 마무리된다.

형세판단 능력은 바둑이 세어지기를 원한다면 수 읽기와 마찬가지로 꼭 갖추어야 할 기본 요건이다. 애기가들이 수읽기 공부는 열심히 하면서도 형세판단에 대해서는 소홀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 역시 저절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해야 알 수 있는 바둑의 한 본령이다.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는 형세라면 모르겠지만, 형세가 오리무중인 듯한 바둑에서 유불리를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쯤해서 시선을 우리 사회로 돌려보자. 검찰수뇌부 탄핵안처리 파동 이후 정부 여당은 어떤 형세판단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바둑을 둘려는 건지 말려는 건지, 궁금하기만 하다. 언론에서는 하나 같이 경제가 불안하다고 강조하고 있고, 노동계가 들썩거리고, 무슨무슨 게이트는 뭐가 그렇게나 많은지 이젠 어느 금융사건이 어느 것인지 제법 매스컴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필자도 헷갈릴 지경이다.

이쯤되면 형세판단 조차 필요없다. 누가 보아도 불리하다. 정부여당이 불리한 형세라면 조금 참고 지내다가 정권을 바꾸면 해결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사회가 불리한 형세라면, 우리 공동체가 위협받는 형세라면 사태는 심각하다. 정치 9단이라는 대통령의 형세판단과 위기관리능력을 보고 싶다. 기보를 뒤집어서라도 객관적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김대현 <영화평론가·아마5단>momi21@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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