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공직자여 ‘늦기 전에’

  • 입력 2000년 11월 17일 18시 32분


수능시험 치는 아이들에겐 쉬운 문제부터 먼저 풀라고 가르친다. 수능만이 아니고 모든 시험에서 통하는 득점 비결이다. 거기서 생긴 우스개가 있다. ‘한국의 우수한 관리는 쉬운 문제 먼저 풀기의 귀신이요, 그것으로 일류대학 가고 시험에 합격해 입신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직의 어려운 문제는 늘 뒤로 제쳐놓는 바람에 손 쓸 수 없이 되고 만다.’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에게서 들은 얘기다.

의약분업 문제만 해도 그런 셈이다. 참으로 수렁에 빠지고만 정책의 표본처럼 보이는 이 국가적 ‘재앙’의 연원을 훑어보면 관련 공직자들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방치가 문제를 키워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의사의 파업횡포, 약사의 직역이기주의 같은 직접적인 문제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의약분업을 ‘99년7월’부터 하기로 법에 정한 것은 94년 김영삼 정부 때였다. 한약―양약분쟁의 와중에 의사들이 ‘약사가 다 해먹는다는 말이냐, 의사의 진료권을 보장하라’고 정부에 요구한 것이 그 계기였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면 벌써 63년에 약사법 개정시에 ‘진료는 의사, 약은 약사’라는 의약분업 원칙을 정했으면서도 시행은 엄두조차 못내온 문제 아닌가.

그래서 94년 복지부 공무원과 의사 약사 3자는 ‘복잡한 문제이므로 시간을 벌어가며 해결하자’면서 멀찌감치 99년7월까지로 미루어 버렸다. 그렇게 세기말까지로 시간을 늘려 잡아놓았으면 당연히 복잡성에 걸맞은 공무원들의 조처가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정부도 의사도 약사도 팽개쳐 두었다. 60년대에 벌써 두번이나 의약분업추진위가 나섰다가 흐지부지되고, 89년에도 의약정 3자가 의약분업 무기연기를 선언한 역사가 있는 것을 공무원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오늘날 재앙으로 커진 의료계파업의 양태로 볼 때 무려 90년대 후반 5년도 넘는 기나긴 세월을 과연 관련 공무원들이 무엇을 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지나간 얘기라 치자. 이제 일년반 정도 남은 2002년 한일공동주최의 월드컵 준비를 살펴보면 ‘축구만 망신거리가 아니다’라는 탄식이 나온다고들 한다. 축구는 그나마 최근 여러 대회를 통해 일본에 ‘한수 아래’라는 국민적 이해라도 얻었으니 다행이라는 말도 나온다.

다 아는 것처럼 일본의 월드컵 유치는 오랜 시일에 걸친 것이고 그만큼 준비기간이 길었다. 한국이 어느날 갑자기 인터셉트하듯이 끼어든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만큼 축구장 같은 인프라 확충도 늦었고 그래서 허둥대는 점을 부인할 길이 없다. 거기에다 지방자치단체의 역량도 연혁과 경험이 앞선 일본이 낫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준비기간과 자치경험의 열세를 인정한다면 더욱 분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축구는 한일이 함께 하고 관광사업은 일본이 독식하고 말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문화 역사 홍보이벤트도 우수한 전문인력을 동원해 알차게 준비해야 할 텐데도 그 구상 밑그림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문화유적 사찰에 외국인용 안내문이나 팜플렛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데가 많다고 안타까워하는 이가 있다.

88올림픽이 그런대로 성공이었다고 하지만, 비교할 대상이 없는 ‘단독 드리블’이었을 뿐이다. 이번에는 일본과 날마다 선연히 비교되는 상황이다. 한국을 보인답시고 예를 들면 꽹과리 사물놀이만으로 될 것인가. 그런 단선적인 이벤트가 지구촌 사람들에게 어필할 리 있으며 일본과 비교해서 다르고 낫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축구경기 말고 총체적인 월드컵 관련 이벤트를 기획하고 관장할 사령탑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장관 차관을 비롯한 윗선은 자리와 정치에 신경쓰고, 실국장 간부는 장차관 눈치나 살피며, 나머지 공무원들은 ‘핵심’에서 외면하는 이슈이니 나도 모르겠다는 식의 공직 타성(惰性)이 흐르고 흘러서 오늘의 의약분업 같은 재앙으로 온 것은 아닐까. ‘봄 연못가에서 꿈을 꾸나 했더니, 벌써 뜰에 오동잎 지는 가을 소리’라던 옛 시를 실감하는 계절이다. 늦기 전에, 참으로 늦어 버리기 전에 손을 쓰라, 공직자여.

<김충식 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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