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강우방/박물관의 역사는 기획展의 역사

  • 입력 2000년 11월 1일 19시 08분


국립 박물관에서의 마지막 기획전이 된 ‘아름다운 신라 기와, 그 천년의 숨결’을 지휘하면서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그런데 문득 ‘국립 박물관의 역사는 바로 기획전의 역사’라고 한마디로 집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 같은 것이 일어났다. 실제로 미술사 연구와 병행해서 늘 바빴던 것은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열린 기획전이었다. 1976년부터 10년 동안 대외적으로 일본 미국 유럽 등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열린 ‘한국미술 5000년전’을 필두로 여러 가지 테마전을 수시로 가졌고, 국내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매년 평균 2회의 기획전을, 지방의 국립 박물관들이 연 1회의 소규모 전시를 열어왔다.

훌륭한 전시에는 오랜 준비기간을 빼고도 유물 수집, 도록 편집, 전시 디자인 등 실제 작업에 1년은 걸리니, 박물관의 역사는 기획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기획전이란 무엇인가. 우리 문화의 전체 흐름을 보여주고 국민을 계몽하는 전시를 상설전시라고 하며 전시품들을 때때로 부분적으로 교체한다. 이에 비해 기획전은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격언대로 어떤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관련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전시해 우리 문화에 의미와 생명을 부여하는 일종의 문화 해석이다. 그런 기획전은 반드시 훌륭한 기획자에 의한 도록 출판이 동반돼야 하는데 그것은 기획자의 저서로 취급돼 학예직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박물관의 평가를, 얼마나 훌륭한 기획전들이 누구에 의해 개최돼 왔는지로 가늠한다. 왜냐 하면 그런 전시는 그 분야의 수준을 한 단계 또는 몇 단계 높이는 뼈를 깎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이 내리는 기회다. 이처럼 연구와 전시를 동시에 겸하는, 즉 작품을 직접 다루며 연구하는 미술사학자를 우리는 ‘큐레이터’라고 부른다. 주관적 감성과 객관적 이성을 균형 있게 갖춘 참된 큐레이터가 있기에 박물관이 빛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유물이 많다고 해도 그런 큐레이터가 없으면 죽은 박물관이나 다를 바 없다.

요즈음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대중화의 명목 아래 이벤트성 전시를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짧은 기간에 즉흥적으로 해버리니 자연히 도록에 실릴 글은 외부 학자에 의뢰하기 마련이다. 이 현상은 특정한 연구테마를 바탕으로 전시가 기획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최소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박물관에서는 해서는 안된다. 사립이나 시립, 도립 박물관 및 미술관에서 때때로 해야 할 성격이다. 그것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립 박물관의 위상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우리 문화를 왜곡하고 연구자를 핍박하는 위기를 초래한다.

문화는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려면 햇수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수십년 이상 걸린다. 기획전은 박물관의 꽃일 뿐만 아니라 나라 문화의 꽃이다. 나아가 인류의 꽃이다. 그래서 획기적인 연구에 바탕을 둔 ‘세기의 전시’란 말도 있지 않은가. 연구의 축적과 뛰어난 안목 및 대담한 예산 투자, 이 3박자가 맞아야 기념비적인 기획전이 가능하다. 그래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나 보스턴박물관 등에서는 늘 향후 10년간의 전시 계획이 빈틈없이 짜여져 있고 담당 큐레이터는 그 일에만 전념하도록 돼 있다. 그러니 그런 큐레이터에게는 역사적 사명감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민도가 낮다고 해서 그에 영합해 경박한 전시를 졸속으로 하는 것은 국민과 문화를 모독하는 일이다. 심혈을 기울여 의미 있는 전시를 계속 열어 훌륭한 큐레이터를 양성하면서 민도를 끌어올려 대중의 안목을 키우고 정신적 성숙을 꾀해야 한다. 기획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전시가 한국문화의 해명과 재발견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인지를 미술사가인 큐레이터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들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창조적이고 발전적으로 전개돼 가는 만큼, 인접국가들의 작품과 비교 전시를 하게 되면 인접국가들의 문화를 더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독창성을 가시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에 기획전의 행위야말로 생명을 걸 만큼 고귀한 것이다.

강우방(이화여대 교수·미술사학·전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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