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남찬순/자살과 비밀

  • 입력 2000년 11월 1일 19시 00분


지금부터 2000년여 전, 중국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직전일 때다.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볼모로 가게 된다. 단은 시황제와 죽마고우였다. 어릴 적 같이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져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그래서 단은 시황제가 당연히 자신을 대접해 줄 줄 알았으나 오히려 시황제의 냉대를 받고 연나라로 탈출한다. 그때부터 시황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단은 전광(田光)이라는 협객을 통해 형가(荊軻)라는 자객을 소개받는다. 전광은 단이 “나라의 대사이므로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하자 웃으면서 “알았다”고만 대답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원히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형가가 진시황 암살에 실패하자 전광이 목숨까지 끊으며 지키려 했던 비밀은 곧 전모가 드러나고 단의 목은 그 다음해에 진시황에게 바쳐진다.

▷전광에 대한 연나라와 진나라의 평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도 한쪽에서 보면 테러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애국적인 죽음이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처럼 나라나 민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자살의 길을 택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한 좌절이나 염세적 세계관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특히 조직이 사회를 지배하는 요즈음은 조직이나 보스 보호형 또는 충성형 자살이 빈번하다. 그같은 자살은 간혹 죽음으로써 무한책임을 진다거나 의리를 지킨다는 식으로 미화(美化)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떤 음모나 사실 또는 진실을 영원히 은폐하려는 동기가 엿보인다.

▷이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 일본이다. 76년 록히드 사건 때는 다나카 전총리의 운전사가, 88년 리크루트 사건 때는 다케시타 전총리의 비서가 자살하는 등 그 예가 많다. 한국에서도 97년 한보특혜대출사건과 관련된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가, 그리고 이번에는 ‘정현준 게이트’의 핵심인물인 장래찬 전 금감원국장이 상당한 비밀을 간직한 채 목숨을 끊었다. 장 전국장이 간직한 비밀이 무엇이건 진실 규명을 위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밝혀내는 게 산 사람들의 몫이다.

<남찬순 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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