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헌의 스포츠세상]프로야구 '추태'는 가라

  • 입력 2000년 10월 16일 18시 28분


중국 당나라 시대 동도(東都)라는 곳의 도지사 여원응(呂元應)은 장기(將棋)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에게 장기 한 판을 이기면 산해진미의 주안상을 대접했고 두 판 거푸 이기면 온 가족의 한달 숙식을 무료로 제공했다. 어느 날 그는 한 장기꾼과 마주했다. 장기꾼은 승부욕심이 지나쳐 장기 도중 도지사가 다른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장기쪽 하나를 슬쩍 바꿔 놓았다. 돌아온 도지사는 이를 눈치챘으나 모르는 척 져주었다.

그때부터 도지사는 심병으로 병석에 누워 얼마 안 가 죽었는데 그의 유언은 이랬다. “천하 인간이 이렇게 타락하여 장기쪽을 바꾸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 험악한 세상 살아서 무엇하랴.”

출전(出典)은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한국인 2세로 태어난 마중가(馬仲可) 교수가 10년 전 쓴 책에 나오는 얘기이다.

지난주 프로야구단 SK의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가 시즌 마지막 경기 출전을 거부한 채 출국했다. 도미니카 출신으로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활동했던 그는 올해 좋은 타격으로 최초의 외국인 타격왕이 될 수도 있었다. 해태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3타수 2안타 이상의 성적만 내면 가능했으니까. 그런데 그는 돌아갔다. 차가운 한마디를 남긴 채. “이런 풍토에서 타격왕을 해서 무엇하랴. 내년을 기약하겠다.”

그는 바로 전날 현대와의 연속 경기에서 현대투수들로부터 철저히 견제를 당했다. 특히 연속경기 2차전 6회에는 투수가 던진 공에 왼쪽 무릎을 맞았다. 현대는 고의적 투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서리가 내려야 가을이 온 줄 아는 것은 아니다. 0.340의 타율 1위인 박종호를 타격왕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5게임이나 출전시키지 않은 현대의 속내를 브리또라고 모르겠는가.

프로야구 타격왕 경쟁 하나 갖고 ‘험악한 세상’까지 들먹이는가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현실의 반영이라 한다면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즌 막바지에 불거져나온 추태가 한둘이 아니란 말이다. 플레이오프에서 편한 상대를 만나기 위해 13안타를 치고도 완봉패한 예, 타격왕을 노리던 동료에게 타격 기회를 한번 더 주려고 고의 실책으로 점수를 내준 일, 최다안타 공동수상자를 내려는 두 팀의 담합, 투수 3명을 공동 다승왕이 되도록 조절한 행위, 타점왕을 만들기 위해 득점상황에 대타로 낸 경우 등등.

스포츠에서도 ‘작전상 패배’는 고려의 대상이긴 하다. 하지만 스포츠의 본질은 페어플레이 정신의 구현이다. 세상이 속이더라도 스포츠는 달라야 한다. 나는 결코 ‘야구를 보아서 무엇하랴’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윤득헌<논설위원·체육학박사>dh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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