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북파 공작원

  • 입력 2000년 10월 4일 18시 36분


1968년 1월19일 저녁, 경기 파주에서 무장괴한 30여명이 서울로 가는 길을 묻고 사라졌다는 신고가 군부대에 접수됐다. 청와대를 노린 북한 124군부대 사건의 예고였다. 북한의 남파공작부대라는 심증을 갖고 이들의 남하 침투로를 추적한 육군방첩대는 반신반의했다. 전투장비를 소지한 이들의 야간 산악행군 속도가 무려 시속 10㎞를 넘었기 때문이다. 보통 군장을 한 군부대의 야간 행군 속도는 시속 4㎞ 안팎이다.

▷방첩대장 윤필용(尹必鏞)준장은 당시 서울 외곽을 지키는 6관구사령관 김재규(金載圭)소장에게 이 속도에 맞추어 매복선을 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6관구 참모들은 제아무리 특수부대라 해도 그럴 수는 없다면서 시속 10㎞선에 못 미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작전을 폈다. 6관구가 매복선을 쳤을 때 남파공작원들은 이미 그 지점을 통과한 뒤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24군부대 사건 직후 우리 육군첩보부대는 특수공작원들을 북파했다. 이들이 원산에 상륙해 ‘상당한 작전’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발하면 반드시 응징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 후 제3국에서 남북의 군첩보부대 고위참모가 만나 “서로 최고수뇌의 목숨을 노리는 공작은 삼가자”는 신사협정을 맺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 후 1972년 5월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주석을 면담할 때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기도를 항의하자 김주석이 “모험주의자들을 문책했다”고 공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맨 처음 북파공작원을 훈련시키고 지휘한 극비첩보부(HID)는 1948년 만들어졌다. 그것이 박정희 정부 이후 육군첩보부대(AIU)로 개칭됐다. 30㎏의 군장에 시속 12㎞의 산악주파라는 훈련목표가 말해주듯이 북파공작원은 말 그대로 인간병기(兵器)라 할 만하다. 정부는 그동안 공작원 북파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한다면 그것은 정전협정 위반을 자인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잔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그 가족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한 국회의원이 실태자료를 공개함으로써 북파공작원 문제가 공론화되는 것 같다. 한 시대사를 정리하는 의미일 수 있을 것이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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