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구호에 그친 경찰개혁

  • 입력 2000년 9월 26일 19시 12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강 짐작은 했던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은밀히 돈을 주고 받은 게 아니라 ‘상납계’까지 조직된 부패 사슬이었다니 말문이 막힌다. 일선 경찰관들이 이른바 ‘미아리 텍사스’ 매춘업소의 뒤를 봐주고 3년여 동안 7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서울경찰청의 수사결과는 그동안 경찰수뇌부가 누누이 강조해온 경찰개혁이 구호에 그쳤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에 수뢰혐의가 드러난 경찰관이 36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들은 서울 종암경찰서에 근무할 때 매월 방범지도계나 소년계 또는 파출소 단위로 업주들이 조직한 상납계에서 돈을 받아다 나눠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단속 부서의 모든 경찰관이 뇌물사슬에 얽혀 매춘업소의 불법영업을 눈감아 주었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상급자에게도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그러나 경찰은 내부상납은 전혀 없었다는 주장이다. 3년이 넘도록 수십명의 경찰관이 부서차원에서 뇌물을 받았는데 상급자가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설령 상납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하직원들의 직무유기를 감시하지 못한 지휘 책임은 면할 길이 없다.

더구나 이번 수사가 경찰이 자체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검찰의 수사자료를 넘겨 받아 수동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수사내용도 그만큼 철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경찰 수뇌부는 이번 사건을 경찰개혁을 재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동안 경찰 총수가 새로 취임할 때마다 빠짐없이 개혁을 강조했고 이무영 경찰청장은 지난해 취임과 동시에 ‘경찰개혁 100일 작전’을 펴기도 했지만 국민이 원하는 경찰개혁은 아직 멀었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물론 시위진압 방식을 개선하고 사이버범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등 평가받을 만한 실적도 없지 않지만 국민이 늘 접하는 일선 경찰관들의 행태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유흥업소나 조직폭력배 단속 등을 둘러싸고 경찰관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고 거액도박과 개인정보 유출 등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경찰개혁은 구호나 선전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요즘 경찰은 언론을 통해 ‘선전’하는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고 경찰내부에서조차 경찰조직이 ‘언론병’에 걸렸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경찰은 우선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하고 그래야만 경찰의 숙원인 수사권 독립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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