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LG정유배 4강전

  • 입력 2000년 9월 19일 18시 51분


“마지막입니다. 하나 둘 셋….”

초읽기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돌부처’로 불릴 정도로 침착한 이창호 9단이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마지막 1분 초읽기에 몰리자 귓볼이 붉어졌다.

‘여덟’ 소리와 함께 한 수를 놓았다. 그나마 숨을 돌렸나 싶어 녹차를 담아둔 종이컵을 들었지만 찻물이 떨어진지 이미 오래다.

상대방인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도 초읽기에 몰려 정신이 없다. 정신을 맑게 해준다며 얼굴에 연신 바르던 ‘호랑이 연고’와 저녁식사 대신 가져온 ‘초콜릿’, 얼굴을 닦던 물수건 등도 이미 관심밖. 시선이 바둑판 위로만 내리 꽂힌다.

<정면도>

백(루이나이웨이 9단)의 절대 선수였던 ▲의 곳을 흑이 차지하자 순간 검토실에는 흑인 역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왔다. 초읽기에 몰린 백이 1로 단수쳤을때 흑은 당연히 3으로 이을 곳. 그러나 이9단의 손길은 흑2에 놓여지고 있었다. 백이 3으로 때려내자 바둑이 허망하게 끝났다.

LG정유배 4강전에서 만난 이9단과 루이 9단. 오전 10시에 시작된 대국이 오후 8시를 넘기고 있었다. 점심시간 1시간 빼고 벌써 9시간째. 이제 끝내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표정없기로 유명한 이9단의 얼굴에도 이순간에는 착잡한 심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최근 삼성화재배에서 저우허양 9단에게 져 3연패를 당했다. 루이 9단에게도 지난번 국수전 도전권을 빼앗기는 등 1승 3패로 밀리고 있는 상황인데 이 바둑도 미세하지만 불리하다. 초반에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 게 아쉽다. 끝내기라면 자신있는데 루이 9단이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는다.

검토실에 모인 목진석 안조영 5단, 김영삼 김명완 4단 등 젊은 강호들은 형세 판단에 여념이 없다. 중반이후 ‘이9단 유리’ ‘루이9단 유리’가 엇갈리던 기사들은 250여수가 넘어가자 “백이 ‘반집’정도 두텁다”는 진단을 내린다. 그러나 이9단은 ‘숨어있는 한집’을 찾아내는데 귀재아닌가. 기사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한수 한수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백(루이9단)이 선수할 수 있는 곳을 소홀히 하다가 흑에게 빼앗기자 검토실은 소란스러워 졌다. 이것으로 역전이 아닐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대국실 모니터를 지켜보던 검토실 기사들은 모두 ‘어’하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초읽기에 몰린 루이 9단이 절대 선수인 곳에 단수를 쳤으나 이9단이 그곳을 잇지 않고 다른 곳을 이어버린 것.(장면도 참고) 루이 9단이 빵때려버리자 바둑이 끝나버렸다. 9시간이나 반집을 찾아 헤메온 대국자나 검토실 기사들의 기나긴 고통과 기다림치고는 허망한 종국이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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