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사람에게도 페르몬이 존재한다?

  • 입력 2000년 9월 13일 18시 29분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아무도 그걸 거역할 수는 없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출세작 ‘향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소녀들을 25명이나 죽인다. 살인이 발각돼 처형장으로 가는 길에 그가 뿌린 몇 방울의 향수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혼음의 광란 속에서 그르누이를 풀어준다. 그루누이가 소녀들의 피부에서 얻고자한 향기를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페로몬’이라고 부른다.

동물의 몸에서 발산되는 물질인 페로몬은 주변에 있는 같은 종의 동물들의 생리와 행동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페로몬은 극소량으로도 매우 강력한 작용을 한다. 암나방 페로몬 몇 그램이면 전세계의 숫나방을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이다.

페로몬은 특히 동물의 성 행동을 유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페로몬을 감지하는 콧 속의 서골비기관의 신경이 파괴된 수컷 쥐는 발정 난 젊은 암컷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암컷들의 신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페로몬을 발산하고 감지하는 모든 과정은 무의식적인 본능이 지배한다.

이런 ‘동물적인’ 감각이 사람에게도 존재하는가의 여부는 항상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만일 그렇다면 시각과 청각을 통한 의식적인 의사소통의 이면에서 우리도 모르게 몸으로 서로의 냄새신호를 주고받아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람에서는 페로몬 신호를 받아 뇌에 전달하는 페로몬 수용체의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 과학권위지 ‘네이처 지네틱스’에는 그루누이가 만들었다는 향수가 전혀 황당한 것만은 아님을 암시하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다. 미국 록펠러 대 피터 몸베르츠 교수팀이 사람의 유전체(게놈)에서 페로몬 수용체 유전자임이 확실시되는 부분을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또 연구자들은 이 유전자가 실제 후각점막에서 발현된다는 사실까지도 확인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적어도 하나의 페로몬 수용체 단백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단계는 이 수용체 단백질을 얻어 여기에 결합하는 페로몬을 찾는 일이다.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사람의 몸을 샅샅이 뒤져 페로몬일 가능성이 있는 물질들을 긁어모아 왔다. 겨드랑이나 생식기 주변의 땀, 오줌, 질 분비물 등에서 찾아낸 각종 후보 물질들만 수십 종에 이른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이런 물질의 냄새를 맡았을 때 보이는 내분비나 행동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이중 일부가 사람의 생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8년 여자의 겨드랑이에서 얻은 땀을 코밑에 바를 경우 월경 주기가 바뀐다는 연구결과가 권위 있는 과학잡지인 ‘네이처’에 실리자 많은 사람들이 인간페로몬의 실체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페로몬을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동물행동학 전문가인 서울대 최재천 교수(생명과학부)는 “사람은 후각 의존도가 낮은 게 분명한 사실”이라며 “하지만 여전히 페로몬을 통해 미묘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그렇지만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연구결과가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인간페로몬이 실제 존재하고 또 작용한다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근본적인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미 오스트리아나 일본 등지에서는 인간페로몬의 존재를 전제로 한 인간행동학 연구가 한창이다.

이들은 남녀의 만남, 조직내의 협력과 갈등, 도시생활 등 현대인의 다양한 활동에 페로몬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일찍이 “모든 고상함을 지닌 우리 인간이지만 그 몸 속에는 여전히 지울 수 없는 하등한 기원의 각인을 지니고 있다”고 갈파했다. 15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강석기 동아사이언스기자>alchimist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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