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사기극'속의 도덕적 해이

  • 입력 2000년 9월 8일 19시 02분


짐작했던 대로 검찰은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을 단순한 ‘사기극’으로 결론짓고 서둘러 봉합하려는 모습이다. ‘외압은 없었다’는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확실한 것은 이번 사건이 세인의 관심에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검찰수사가 풀지 못한 의혹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특검제를 도입해서라도 외압의 실체를 비롯한 각종 의혹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의 발표대로 지점장 일개인이 아무런 외부압력 없이 1000억원대의 자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빼낼 수 있는 은행이라면 그 은행의 여수신업무는 시스템이 아닌 사람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언제든 금융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외압이 없었다는 검찰의 발표가 맞다면 그렇게 오랜 기간 ‘사기극’이 계속됐는데도 은행의 내부감시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은행의 경영능력 자체를 의심케 하는 증거다. 이런 은행이 과연 고객의 돈을 제대로 지켜주고 불려주는 능력과 신용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도 이 은행의 김진만 행장이 국민과 고객에게 사과하기는커녕 4일 기자회견을 통해 “어떤 외압이나 청탁도 없었으며 직원과 업자간의 부도덕한 사기극”이라고 이번 사건을 단정하고 나선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당시 검찰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흡사 수사담당자처럼 정부 내 당사자들과 똑같은 내용의 주장을 발표한 것은 그것이 자율에 의한 것이었건 정부의 요청에 못 이겨 한 행동이었건 행장의 입장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특히 실망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한빛은행이 공적자금을 3조원이나 쓰고도 아직도 경영정상화에 실패한 금융기관이라는 점이다. 그런 수준의 관리를 했기 때문에 부실해진 것인지, 아니면 은행이 부실하고 허술해지니까 이번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국민의 세금이 퍼부어지고 있는 은행에서 이런 초대형 불법대출 사건이 터졌다는 것은 부실금융기관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와 감독당국의 업무태만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검찰 발표대로 이번 일이 권력형 부패사건이 아니라면 은행 감독당국은 사기극에 놀아나 국민부담이 될 부실채권을 키운 은행경영진에 대해 강력한 문책을 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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