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조광조-송시열, 그들이 목숨을 건 까닭은…

  • 입력 2000년 9월 8일 18시 57분


조광조(왼쪽)와 송시열
조광조(왼쪽)와 송시열
◇조광조

“전하께서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리십시오. 그러면 도가 조정에 서게 될 것이니 나라의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서게 되고 법도 또한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34세에 관직에 진출해 38세에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할 때까지 단 4년간의 삶으로 조선 선비의 모범이 됐던 조광조(1482∼1519). 유교정치의 이상은 바로 수신(修身)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그의 논리는 너무 단순하고 명쾌해서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것은 언제나 원칙이었고 그 원칙의 고지식한 실천을 끝내 관철하고자 했다.

세조의 찬탈과 연산군의 학정 그리고 연산군을 내쫓은 쿠데타 등 연이은 반유교적 사건으로 조선 왕조의 정체성이 크게 위협당하고 있다고 진단한 그는 대책을 묻는 중종에게 유교의 이념적 방향을 제시하고 왕과 신하들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의 대책문(對策文)에서 받았던 감동을 잊지 못한다는 저자는 조선시대 선비의 이상형이었던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유교 국가를 표방했던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고, 이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광조는 왕조의 이상적인 ‘도덕적 교사’로서 오래 기억되는 존재가 되었다.”

▼'조광조'/ 정두희 지음/ 아카넷/ 307쪽 1만8000원▼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그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이날 밤 별 하나가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우암이 죽은 지붕 위에 뻗쳤다.”

“송시열은 계교가 궁하자 다리를 뻗고 바로 드러누웠다. 도사 권처경이 재촉했으나 종시 마시지 않으므로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못돼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될 만큼 역사상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됐던 송시열(1607∼1689). 그의 죽음을 묘사한 이 두 편의 글은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른지 알려 준다. 83세까지 장수를 하다가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된 그는 노론이 재집권하자 공자와 함께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어 유학자로서 최대의 영광을 누렸고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로 불렸다.

이처럼 상반된 찬사와 저주 사이에서 송시열의 진실을 추적해 간 저자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적 현실, 송시열의 생애 등을 살핀 후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변화를 실현시키는 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면 송시열은 진정한 성인으로 많은 백성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黨益)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이덕일 지음/ 김영사/ 401쪽 1만900원▼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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