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권력'있다고 성희롱 꿈도 꾸지마

  • 입력 2000년 9월 8일 18시 33분


경기 파주시에 있는 K산업의 P사장(42)은 퇴근 후 여직원 L씨(25)의 휴대전화에 ‘만나달라’는 메시지를 남겨두곤 했다. 토요일인 7월15일 밤 12시경에도 휴대전화로 “만나주지 않으려면 출근하지 말라”고 말하다 거절당하자 욕설이 담긴 메시지를 25개 이상 남겼다.

L씨는 연휴가 끝난 뒤 18일 출근해 P사장에게 따졌으나 그는 “술에 취해 그런 것”이라며 얼버무렸다.

서울 노원구 P복지관 L관장은 인사를 안한다는 이유로 여성 사회복지사들의 엉덩이를 때리거나 결혼한 복지사들에게 “결혼 후 비실거린다”고 말하곤 했다. 또 회식자리마다 이들에게 술을 따르게 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사회복지사 S씨(27) 등 5명은 3월말 집단사표를 내고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에 시정을 신청했다.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위원장 백경남·白京男)는 8일 ‘남녀차별 및 성희롱 결정을 위한 전원회의’를 열고 이들 사건에 대해 남녀차별금지법 위반으로 시정 권고했다. 이는 성희롱이나 성폭력 역시 남녀차별의 한 유형이며 시정하지 않을 경우 법적 제재를 받게 됨을 명백히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실제로 여성특위에 시정을 요구하는 성희롱과 성폭력 건수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7월 남녀차별금지법 시행 이후 성희롱과 성폭력을 포함해 남녀차별사항으로 접수된 사건은 모두 1208건. 이중 지난해 7∼12월 6개월간 성희롱건수는 17건에 불과했으나 올 들어 1∼8월 8개월간의 건수는 71건으로 크게 늘었다.

여성특위 조진우(趙鎭宇)담당관은 “직장내의 성희롱은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단지 일자리를 잃을까봐 당하고만 있던 여성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법에 호소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희롱 성폭력의 심각성은 이들 사건이 ‘권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있다.

K산업의 P사장이나 P복지관의 L관장은 피해자들의 고용이나 임명권을 가지고 있다. 또 이날 함께 성희롱결정이 난 ‘충남 00대 교수의 여대생 성희롱’사건 역시 권력 내지 상하관계에 의해 벌어진 것이다.

권력관계에 의한 성희롱 성폭력은 우리 사회에 만연돼 있다고 여성문제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장원(張元)전 총선시민연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6월 한달간 설정한 특별신고기간과 상반기에 접수된 성폭력사건을 분석한 결과 사회지도층에 의한 성폭력이 106건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가해자의 직업은 기업인(35.9%) 교육자(26.5%) 성직자(14.2%)의 순이었으며 공직자와 전문직종사자도 각각 7.5%를 차지했다. 피해자와의 관계도 절반이 직장상사와 부하직원(51.8%)이었으며 교육자―제자(26.4%) 성직자―신도(14.2%) 전문직종사자―고객(7.6%)의 분포를 보였다.

상담소는 “성폭력은 그들의 권력 및 권위 때문에 그간 은밀히 자행되고 은폐돼 오다 피해자가 신고에 나서면서 현저히 드러나고 있다”며 “이것은 성관계가 아니라 권력관계이며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김진경기자>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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