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정치인과 기자

  • 입력 2000년 9월 8일 18시 33분


미국 대통령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뛰고 있는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뉴욕타임스 기자를 가리켜 ‘지겹게 싫은 놈’이라고 욕한 것이 공개돼 곤욕을 치르고 있다. 부시 후보는 유세장에서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측근과 은밀하게 얘기하다가 그같은 표현을 썼는데 그것이 확성기를 통해 공개되고 만 것이다. 부시 후보는 자신의 유세를 따라다니며 취재하는 그 기자가 질기게 사생활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기사내용도 불리하게 쓰는데 불만이었다고 한다.

▷정치인과 기자는 흔히 상부상조 관계라고 말한다. 부시 후보가 유세장에서 민생문제를 이슈화하면 뉴욕타임스 같은 유력 언론이 보도해야 널리 알려질 수 있다. 유세장의 연설이 많은 유권자들에게 전달돼야 득표전에서 유리한 것은 물론이다. 다른 한편 언론이 독자적으로 취재한 고발기사는 정치인에 의해 정치문제화 돼야 그 보도가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것을 행정부나 국회가 의제로 채택하고 해결책을 논의하는 일도 많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치인과 기자는 독자적으로 의제를 설정하면서도 서로 보완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의 본령인 감시와 비판 기능을 생각하면 정치인과 기자 사이는 보완관계라기 보다는 긴장관계로 보는 것이 옳다. 거물 정객일수록 기자의 감시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기자를 적대시하다간 불리하게 비판당할 것이 꺼려진다. 정치인들이 기자를 평할 때 많이 쓰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라는 표현도 바로 그런 뜻을 담고 있다. 가까이 하자니 조심스럽고 멀리 하면 적대감을 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활동을 알릴 통로가 없어진다는 얘기다.

▷과거 한국의 어느 거물정객은 출입기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만들어버리는데 능숙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정객과 가까운 기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장학생’이라는 듣기 거북한 말이 언론계와 정가에 떠돌기도 했다. 그것을 라이벌 정객은 ‘○○○고학생’이라고 꼬집었다. 미국이라고 정치인과 기자의 유착관계가 없으랴마는 부시 후보의 실언사건으로 역시 언론과 정치인은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임을 새삼 확인케 해 주는 것 같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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