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화가의 길

  • 입력 2000년 8월 6일 18시 58분


화가의 사회적 지위는 14∼16세기 르네상스를 계기로 급상승한다. 이전까지 화가는 중세 길드에 속해 있는 ‘기술자’에 불과했다. 이들은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귀금속을 세공하거나 의복을 디자인하는 등 오늘날 미술 범주에 들어 있는 여러가지 일을 도맡았다. 르네상스기에 들어와 이들은 피렌체 베네치아 등의 신흥 부르주아 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비로소 예술가 대접을 받는다.

▷중세 유럽에서 화가들의 가장 큰 ‘고객’은 왕과 교회였다. 왕들은 권위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교회는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화가들에게 많은 미술품을 주문했다. 르네상스기는 무역과 상업으로 큰돈을 거머쥔 신흥 부자들이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한 시기다. 이들까지 미술품 주문에 가세하면서 화가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일종의 시장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이같은 화가들의 ‘태평성대’가 막을 내린 것도 시장(市場)의 힘과 관련되어 있다. 17세기 이후 왕정과 교회의 영향력이 차츰 약화되고 신흥 부자들이 주축이 된 도시국가들도 쇠락하면서 미술품 주문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화가들은 대중을 상대로 그림을 팔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생활방편으로 부업을 갖는 화가들이 생겨났다. 요즘도 이같은 창작여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미술계도 생존경쟁이 치열하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 해마다 수천명씩 쏟아져 나오고 기존 화가들도 ‘이름’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 미술시장은 ‘시장’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빈약한 규모다. 그 경쟁의 냉혹함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 결과 거의 독학으로 미술을 연마한 48세의 고졸 화가가 최고상인 대상을 차지했다는 소식이다. 앞으로 활약을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단 남보다 크게 불리한 여건에서 경쟁을 통과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가 힘든 과정을 겪으며 지금껏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예술이 지닌 신비스러운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사로잡는 예술의 힘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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