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최재천/'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입력 2000년 7월 7일 18시 51분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 클레이본 카슨 엮음 / 바다출판사

1979년 여름 내가 미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일이다. 낯선 기숙사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튿날 나는 아침 일찍 공동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욕실문이 열리며 거울 속 저 편에서 커다란 체구의 흑인 한 명이 아랫도리를 수건으로 가린 채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온몸의 털들이 일제히 솟구치는 것 같은 전율에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거울 속의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공부하러 이 먼 데까지 와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있는 동안 그는 두어 개 옆의 세면대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미리 가지고 온 작은 수건으로 세면대를 깨끗이 훔치기 시작했다. 행여 머리카락이라도 그 쪽으로 돌아갈세라 붙박은 듯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나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 한 구석으로 지켜보았다. 조용히 면도를 끝낸 그는 또 세면대를 깨끗이 닦은 후 가만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어려서 본 흑인이래야 미군 병사가 고작이고 그들의 뒤통수에 “깜둥이”라 고함을 질러대고 도망치던 경험이 고작인 내가 숨소리가 들릴 듯 가까이 만난 첫 흑인이었다. 그로부터 대여섯 해가 흐른 어느 날 불쑥 가장 존경하는 인물 셋을 대라는 설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별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마틴 루터 킹, 아서 애쉬, 쥴리어스 어빙의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모두 흑인이었다.

지금 다시 누가 나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 않고 이 세 분의 이름을 댈 것이다. 에이즈에 감염된 많은 이들이 수혈을 탓하지만 그걸 믿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서 애쉬가 감염된 피 때문에 에이즈를 얻었을 것임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덩크슛을 개발하여 농구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코트의 신사 쥴리어스 어빙의 별명 ‘닥터 J’는 내가 학생들로부터 제일 듣고 싶어하는 별명이다. 검붉은 입술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그들의 치아가 유난히도 희듯이 그들의 검은 피부 밑에는 슬프도록 희고 고운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내가 만일 타임머신을 타고 어느 시기든 가볼 수 있다면 나는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으로 갈 것이다. 킹목사님의 그 피끓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현장에서 듣고 싶다. 그의 연설을 듣고 일어서지 않을 자 있을까. 녹음으로 듣는 그의 음성에도 내 온몸의 털들이 일어선다. 체 게바라에게 감명 받은 이들에게 이제 마틴 루터 킹을 권한다. 더 이상 불이익을 당할 수 없다, 농성하는 이들에게 그의 비폭력저항정신을 권한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그의 꿈을 권한다.최재천(서울대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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