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헌의 스포츠세상]보고싶은 북녘의 장사들

  • 입력 2000년 6월 19일 19시 11분


‘충혜왕 원년(1331년) 3월, 왕이 정사를 총신들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小童)과 씨름을 하매 상하의 예가 없었다.’ 고려사의 이 기록은 씨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으로 꼽힌다. 그러나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인의 모습은 씨름의 역사를 음미케 한다. 단오나 추석 때 민속행사로 벌어진 씨름은 바로 우리 삶의 자취인 것이다.

“김귀달이라는 사람은 윤공원보다 15세나 아래였는데 상투를 쥐고 메치기로 승리했어. 그런데 어린 사람이 감히 어른의 상투를 잡았다 해서 결국 패한 것으로 되고 말았지.”

“정초에 보름씩 열렸는데 장구 북 등이 동원돼 요란했지. 당시엔 관중의 힘이 대단해 판정의 절반 정도를 좌우했어.”

원로들의 증언이긴 하지만 단성사 마당에서 근대적 정식 씨름이 시작됐다는 1912년 이후의 얘기만 묶어도 끝이 없을 성싶다.

조선씨름협회가 창립된 1927년 이후의 얘기도 진진하다. 1929년 조선체육회와 공동개최한 대회에서는 이도남이 우승했고, 1930년에는 김윤근이 우승했는데 두 사람은 함경남도 함주군 같은 마을 출신이라는 것이다. 특히 김윤근은 1930년대 초 전국을 돌며 황소도 수십마리나 탔으며 여의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대회에 가는 등 전성시대를 구가했다고 한다.

협회가 1936년 마련한 전조선대회 1회에는 함흥의 현명호, 2∼4회에는 황해도 황주의 송병규, 5회에는 평양의 허승화, 6회에는 함흥의 최장호가 우승했다는 기록도 있다.

역도산(본명 김신락)의 얘기도 있다. 그는 1938년 형 김항락이 편파적 판정으로 패했다는 중계방송을 듣고 발끈해 함흥에서 밤 열차로 상경해 심판에게 사과를 받는 한편 번외로 통씨름(허리에 샅바를 매는)경기 제의를 받아 11명의 장사를 꺾고 우승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씨름판 에피소드 중 북쪽 장사의 얘기를 꺼낸 이유는 역시 남북씨름 교류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 후 스포츠교류가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지만 서민의 정서가 담긴 씨름 교류만큼 새롭게 들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막강한 계보를 형성했던 함경도 및 평안도 장사가 남쪽 장사들과 모래판을 뒹구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근사하지 않은가. 실력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씨름은 북한에서도 1957년부터 널뛰기 그네뛰기와 함께 민족체육경기 종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한씨름협회는 최근 중국 옌볜지부를 통해 교류추진을 밝혔다. 프로단체인 한국씨름연맹도 8·15나 추석에 북한에서의 시범경기 및 친선경기 추진을 발표했다. 두 단체가 따로 추진하는 모습이 민망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교류의 실현이다.

<논설위원·체육학박사> dh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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