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정상회담 이후의 '가치'

  • 입력 2000년 6월 9일 19시 02분


늘 민주화와 민족과 못사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면서 정작 당신이 거느린 식솔들에게는 한없이 무력했던 분, “통일이고 민주화고 개뿔이고 간에 아버지 제발 우리한테도 좀 신경을 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내가 대들면 말없이 한숨만 내쉬시던 분.

둘째 아들 김한길(국회의원·민주당)이 말하는 ‘나의 아버지 김철(金哲)’의 한 대목이다. 국토분단과 6·25전쟁, 이승만정권 이래의 독재와 군사정권하에서, ‘사회주의’를 내걸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니 오해마시오”라고 외쳐봐도 냉전논리를 바탕으로 권력을 지탱하고 있던 집권자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들으려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물론 ‘진보’ ‘혁신’ ‘좌파’ 등을 얘기하면 바로 ‘빨갱이’로 의심받던 상황에서도 김철(1926∼1994)은 고집스레 ‘민주적 사회주의’를 외쳤고 ‘사회당’을 지켰다. 그러니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삶도 온전했을 리 없다.

황폐해진 사상의 숲

70년대 유신정권하에서 ‘민주회복국민선언’을 주도한 것 등을 이유로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른 그는 이미 60년대 이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한반도 주변 4강의 교차승인에 의한 통일방안, 노동자의 정치참여 보장, 복수노조 인정, 고위공직자 재산등록제 등 진보적 정책들을 주장했다.

어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있었던 그의 전집(전5권)출판기념회와 학술심포지엄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열렸다는 점에서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다시 생각케 하는 남다른 자리였다.

혁신계 진보정치인을 얘기하자면 냉전체제의 대표적 희생양인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을 빼놓을 수 없다.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죽산은 ‘북진통일론’을 내세운 이승만독재정권에 의해 생명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역사에서 가정법을 얘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요, 당시 상황으로는 꿈같은 얘기지만 만약 죽산과 진보당이 법살(法殺)되지 않아 진보와 보수정당이 건전하게 경쟁하는 정당정치가 이뤄졌더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훨씬 일찍 꽃피웠을 것이다.

반공(反共)을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이용한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이 땅의 사상의 숲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마음껏 토론하고 고뇌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보는 풍토는 메마를 대로 메말랐다. 이쪽과 저쪽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의식의 유연성이 없는 사회였다. 생각과 논의의 스펙트럼은 좁기만 했다.

다양성보다는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단순하게 가르는 것에 길들여져 왔다.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대라고 다그치는 사회였다.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 친정부냐 반정부냐, 개혁이냐 반개혁이냐, 주류냐 비주류냐, 호남이냐 아니냐, 영남이냐 아니냐, 내가 믿는 신(神)만 신이고 네가 믿는 것은 미신이고 우상 아니냐… 등등.

左右 초월의 가치 모색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기대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가시적인 성과보다도 이 회담을 계기로 남북 모두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갖는,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는 작은 씨앗이라도 뿌려진다면 그보다 더 큰 성과는 없을 것이다. 정상회담 한번으로 전쟁과 분단 55년의 세월이 쌓아놓은 불신의 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는 없다. 북한이 금방 달라지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여전히 무력도발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냉전시대를 살아오면서 굳을 대로 굳어진 사고의 틀을 깨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하는 내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한결 여유를 찾을 것이다.

전쟁과 대결을 강요했던 국제냉전이 종식된 지는 이미 오래다. 이제 우리도 누가 좌냐 우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 21세기의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가를 모색할 때다. 그래서 대결과 대립이 아닌 화해의 정신으로 인간다운 삶의 길을 어떻게 함께 걸어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야말로 이번 정상회담의 진정한 의미라고 믿는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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