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겉 다르고 속 달라서야

  • 입력 2000년 5월 22일 19시 13분


날씨 예보에 더러 체감(體感)온도라는 말이 나온다. 몸으로 느껴지는 온도가 계기반의 그것과 차이가 클 때 쓰인다. 이번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세계 최초(?)로 ‘체감 선거비용’이라는 말을 들고 나왔다. 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후보들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이 썼을 것으로 다들 보고 있는 데 신고액수가 너무 미미해 그 갭을 메우기 위한 표현이다.

물론 퍼부은 액수 다르고, 신고액수가 다른 것은 법정 선거비용이라는 ‘모범답안’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법정비용의 규모를 한없이 부풀릴 수도 없는 일이다. 선거로 인한 비용 손실이 필요 이상으로 커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딜레마 속에 이 나라 국정을 앞으로 4년간 주도하게 될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출발선에서부터 ‘반칙 스타트’의 혐의를 받고 있다.

찜찜하고도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여론은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엄혹하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엄정하게 조정해야 할 당선자들이 호적에 잉크를 묻히면서부터 사기 치기냐고 비아냥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자세로 국정에 임한다면 그들에 의한 16대 국회 4년은 빤하지 않겠느냐는 질책인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二重)구조는 지방자치단체의 선거 비용에도 자리잡고 있다. 수많은 단체장, 지사 시장 군수들이 검찰에 비리로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선거를 다시 치르는 낭비와 소모가 잇따르고 있다. 한두 해 사이 경기도에서만 안양 용인 화성 안성 등지 단체장이 뇌물 등으로 문제가 되었다. 겉만 보면 범죄를 저지른 관리를 처단하는 일이니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검찰이 단체장을 혼내주려면 간단하다고 한다. 수사기법도 어려울 게 없다. 그 지역 유수의 건설업체를 뒤져 자금흐름을 캐다보면 거개가 이상한 돈이 빠져나간 것이 드러나고 그것을 추적하면 ‘정치적 배후’와의 유착이 포착된다. 그 건설업자를 옥죄면 예외 없이 크고 작은 단체장의 비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 군수치고 검찰이 손대면 성할 사람이 있을까’라는 말도 있다. 검찰에서도 이 문제의 연원을 분석해 놓고 있다. 물론 단체장 가운데 돈을 밝히는 범죄성향의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국회의원 후원회 같은 제도가 없는 것도 한 원인인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지방선거에 나서는 이들에 대한 후원회까지는 여론도 환영할 리 없고 국회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국민의 부담을 더해서는 안된다는 겉 명분이 앞선다. 그러나 선거를 치러야만 하는 자치단체장들은 “국회의원들만 후원회의 이점을 누리려고 한다”고 불평이다.

무기 중개상 린다 김 로비의혹과 고속철도 로비 파문으로 로비 양성화(陽性化)문제가 제기 된다. 그러나 같은 이치로 양성화 반대가 압도적이고, 음성적인 이대로가 좋다는 의견이 앞선다. 역시 로비스트를 제도적으로 설치게 만들면 얼마나 시끄럽겠느냐, 지금 이대로도 로비나 설명이 안돼서 비리가 생기느냐, 그런 것까지 법제화할 필요가 있느냐, 심지어 사기꾼들에게 ‘자격증’까지 줄 수 없다는 분위기도 있다.

과연 그럴까. 최근 한국에 온 미국 오리건주 상원의원 임용근씨는 말한다. “로비 양성화는 국민에게 이롭다. 로비가 음성화되면 검은 돈이 오가고 사익(私益)에 따라 왜곡된 정책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단언한다. 오리건주만 해도 1000여명의 로비스트가 등록되어 활동하고 그들이 각 의원의 선거비용 20만달러의 반 가량을 지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제한 액수를 지키고 또 시민단체 유권자가 이를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부패스캔들은 없다는 것이다.

학연과 지연, ‘사연(私緣)’ 같은 보이지 않는 ‘끈’이 유별나게 힘을 발휘하는 우리 풍토에서 과연 음성적 로비, 불투명한 선거비용을 덮어 둘 경우 ‘속’이 성할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도덕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결국 음성적 코스트를 치르는 문제요, 그것은 곧 국민 주머니를 털어내는 문제로 귀착하게 된다. 행정부 국회 지방자치단체 까지를 포함해 겉과 속을 근접시키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정치와 비용의 함수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투명화 합리화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때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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