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세상]'부름의 전화' 자원봉사 박인병 소방장

  • 입력 2000년 4월 28일 18시 46분


“바로 앞에 계단이니까 발조심하시고요, 힘드시면 제 손을 꼭 잡으세요.”

28일 오후 서울 도봉구 도봉2동 서원아파트 108동 앞 공터. 이 아파트에 사는 시각장애인 용승희씨(49)의 손을 잡은 박인병(朴仁炳·46)소방장은 조심스레 한걸음 한걸음을 내디뎠다.

서울 창동소방파출소에서 근무 중인 박소방장의 이날 ‘임무’는 앞 못 보는 용씨를 인근 은행까지 바래다주고 예금을 찾도록 도와준 뒤 무사히 귀가시키는 것.

이날 용씨의 ‘눈’이 된 박소방장은 한낮의 인파와 차량행렬을 피하느라 연신 주위를 살피며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용씨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은행에 볼일이 있어도 도저히 갈 엄두가 안 나 며칠 동안 애태웠는데…. 박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일을 마친 뒤 용씨는 깊이 고개숙여 박소방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올해로 12년째 장애인 봉사단체인 사단법인 ‘부름의 전화’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 중인 박소방장은 “몸이 불편한 이웃을 위해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행복”이라며 환히 웃었다.

81년 소방관 생활에 투신, 구급대와 상황실 근무를 거쳐 현재 화재 진압대원으로 재직 중인 박소방장이 장애인 봉사활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88년 가을. “구급대원 생활을 하면서 다수의 장애인들이 주위의 냉대와 무관심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고된 근무여건 속에서도 그는 비번날마다 어김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장애인들을 찾아 때로는 그들의 ‘수족’(手足)으로, 때로는 ‘눈과 귀’ 역할을 도맡았다.

‘장애인의 도우미’로서 그가 맡은 일은 시장보기, 길 안내, 관공서 방문, 책 읽어주기, 이삿짐 나르기 등 다양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주위의 편견 속에서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일부 장애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서기란 쉽지 않았다.

“한번은 도움을 주고도 ‘사기꾼’으로 오해를 받아 난감했던 적도 있었지만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그분도 제 진심을 알아 주셨고요.”

박소방장은 지금도 첫 봉사활동의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한다. 공사장에서 허리를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30대 중반의 남자를 인근 병원으로 데려가던 길. “1시간이 넘도록 택시와 버스를 향해 손을 내저었지만 허사였습니다. ‘장애인의 현실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숙인 채 낙담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박소방장은 해마다 사회적응훈련의 일환으로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제주도나 서울 주변의 산을 오르는 등반대회에 참가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매년 여름휴가에 맞춰 이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온 그는 그 이유를 “남의 이목이 두려워 외출을 꺼린 채 방에만 갇혀 있던 장애인들이 환한 햇살 속에 들판의 꽃과 나무를 어루만지며 맘껏 웃음짓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가족은 물론 주위 동료들에게조차 장애인 봉사활동을 알리지 않았던 박소방장은 3년 전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일흔이 넘은 노모가 백내장 수술을 받은 뒤 후유증으로 두 눈을 실명해 1급장애 판정을 받은 것. “‘왜 하필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치나’ 하는 원망도 많이 했지만 그 뒤 연로한 장애인을 만날 때마다 모친 생각에 ‘더 잘해 드려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최근 숨겨오던 선행이 알려지면서 서울소방방재본부로부터 ‘으뜸소방관’으로 선정된 박소방장의 작은 당부 한가지. “장애인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자기와 다르다’는 편견을 버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며 길 안내를 할 수 있는 주위의 작은 관심과 배려만이 그들의 상처를 감싸안는 ‘명약’입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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