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명재/재벌이 벤처에 배울 점은?

  • 입력 2000년 3월 15일 19시 21분


대기업의 사장들은 요즘 울적하다.

수십년간 ‘무대의 중심’에 서 있다가 갑작스러운 벤처열풍에 떠밀려 마치 ‘한물간 배우’로 전락한 것 같은 씁쓸함이랄까. 얼마전 사석에서 만난 한 재벌 계열사 사장의 말 속에도 그런 심정이 녹아 있었다.

“대기업들은 거래소시장에서 제대로 자금조달도 못할 만큼 찬밥 신세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벤처의 ‘실상’을 꼬집는 말에선 벤처 열풍을 난데없는 ‘광풍’으로 보는 시각이 엿보였다.

“한국의 벤처기업들은 우물안 개구리가 많다. 실리콘밸리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우쭐댄다.”

“매출액이 20억원밖에 안되는 회사들이 어떻게 수백배나 되는 자산을 가진 대기업보다 시가총액이 더 많을 수 있느냐.”

수십년간 한국 경제를 이끌어왔다는 자부심에서 나올 법한 ‘이유있는 항변’으로 들려 적지않은 공감도 갔다. ‘하루아침에’ 주변부로 밀려난 듯한 소외감을 느끼는 대기업의 경영자들이라면 아마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대기업들도 섭섭한 심정을 잠시 접고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예컨대 작년말까지만 해도 무성하던 ‘재벌개혁’논의가 올들어 자취를 감춘 데 대해 많은 이들은 “수십년간 정부가 못한 재벌개혁을 벤처가 대신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이들은 벤처열풍이 낳고 있는 갖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벌을 대체할 한국경제의 새 주역으로 벤처를 지목한다.

벤처는 과연 대기업과 비교해 무엇이 우위에 있을까. 오너의 말 한마디에 숨죽여야 하는 답답한 분위기, 머슴처럼 열심히 일해도 ‘꿈’을 갖기 힘든 상실감. 그런 것들이 벤처에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전례없는 전환기’에 선 재벌의 자기개혁은 벤처가 던져주는 이같은 ‘메시지’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갖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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