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사토 다다오/日 강타한 '쉬리'의 작품성

  • 입력 2000년 2월 7일 19시 57분


최근 일본에서 개봉된 한국영화 ‘쉬리’의 히트는 이변이라 불릴 정도로 주목받는 현상이다. 지난달 22일 일본 전국 35개관에서 개봉된 ‘쉬리’는 29일 전국 91개관으로 확대 개봉됐고 이달 5일에는 120여개관으로 늘어났다.

일본에서의 ‘영화의 히트’에는 몇 단계가 있다. 일본 영화관은 좌석 800석 이상의 대형관과 400석 이하의 중소관으로 나뉘어 있고 대형관들은 거의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 점령당한다. 일본 영화도 메이저 영화사가 제작한 소수의 작품 외에는 대형관 상영이 어렵다. 할리우드 영화를 제외한 대개의 외국 영화들은 ‘단관 로드쇼’(중소규모 극장 한 곳에서 장기 상영)에만 성공해도 히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홍콩 액션영화가 대형관에서 상영됐던 극소수 사례를 제외하고 아시아 영화 중에서는 중국 대만 인도 이란 영화 중 몇 편이 ‘단관 로드쇼’로 성공한 예가 있다. 한국영화로는 ‘서편제’가 지금까지 히트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할리우드 대작 영화와 마찬가지로 대형관에서 동시에 개봉되고 점점 상영관 수를 늘려가는 ‘쉬리’의 성공은 진정한 히트다. ‘쉬리’는 일본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외국영화가 할리우드산만은 아니라는 이변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빠른 NHK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현상’으로 뉴스에서 다룰 정도였다.

할리우드의 액션 대작과 비슷한 수준에 이른 ‘쉬리’의 작품 완성도도 주목할 만하다. 할리우드 액션영화보다 못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적어도 대등한 비교가 가능한 작품이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일본에서도 아직 이 정도의 현대적인 액션 대작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이 ‘쉬리’에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현실감에 있다. ‘쉬리’에도 비현실적인 요소와 상황 설정들이 있지만 북한 테러단 서울 진입사건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현실에 근거한다. 오락영화이지만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일본인에게도 북한의 움직임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북합동 축구 시합이 열리는 서울에서 남북한 수뇌부가 환호를 받으며 악수하는 스토리는 지금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이처럼 기대되는 꿈도 없다. 한국인에게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그렇다. 이 상황에서 북한 테러단이 남북한 수뇌를 동시에 쓰러뜨리고 혼란을 야기하려 한다는 ‘쉬리’의 상황 설정은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이다. 군대, 특히 비밀 정보조직이 독자 이데올로기를 갖고 폭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근대 세계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액션영화라고 해서 단순한 곡예처럼 보아 넘겨버릴 수 없는 면이 있는 것이다.

일례로 한국 정보원(한석규)과 북한 테러요원들이 서로 총구를 겨냥한 채 어느 쪽에서도 먼저 쏠 수 없는 상태로 맞서는 장면은 현재 한국과 북한의 군사적 대결 상황의 축소판같은 이미지다. ‘쉬리’는 액션의 화려함에서는 할리우드나 홍콩 액션영화에 뒤지지만 집단적 행동 속에서도 모든 인물이 강렬한 긴장감을 발산하는 점에서는 그 이상이다.

‘쉬리’의 장점은 북한의 위협을 다루면서도 북한 스파이들을 이데올로기의 맹목적인 노예가 아니라 고뇌하면서 절망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쉬리’의 등장인물들은 격렬하게 경계하고 대치하면서도 깊은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바로 이 점이 ‘쉬리’를 단순한 오락 이상의 절절한 아픔을 담은 작품으로 만든다. ‘쉬리’가 흔한 미국의 액션 대작을 뛰어넘어 일본인들로부터 공감을 얻는 이유다.

사토 타다오(佑藤忠男·일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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