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95)

  • 입력 1999년 12월 12일 19시 47분


우리가 함께 법석대며 정성을 쏟아 만들어 놓은 눈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한낮의 햇빛에 녹아내리고 난 뒤 최초의 형상은 사라지고 우리가 붙여둔 숯덩이 눈썹이며 눈이며 고추를 꽂은 붉은 코도 다 떨어지고 씌웠던 모자는 바람에 불려 날아갔어요. 그리고 얹어 놓았던 머리는 몸통 위로 녹아 내려 작은 눈더미가 되어 누렇게 흙과 먼지로 더럽혀져 있어요. 아이들의 재깔거리던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바퀴와 발길에 진창이 되어버린 일상이 무심하게 거리에 남아 있겠지요.

▼23▼

그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당신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나는 어떤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당신은 오래 전부터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은결이마저 내게는 마찬가지였어요. 감옥도 당신에게는 생의 일부분이었듯이 그 까마득하게 먼 땅에서의 나의 뒤늦은 사랑 역시 내 인생의 귀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팔십구 년 오월이었어요. 오월은 여기서 가장 찬란한 축복 같은 계절이에요. 추위와 을씨년스러움이 낮은 먹구름과 함께 물러가고 햇빛 같은 밝은 하늘이 열려요.꽃이 얼마나 한꺼번에 피어나는지 꽃가루 알레르기에 걸린 사람들이 초겨울의 감기 환자들처럼 눈이 충혈되어 마스크를 하고 연신 코를 풀면서 거리에 나돌아다녀요.

슈테그라츠에서 출발하는 지하철 구 호선을 탔는데 나는 티어가르텐에서 내릴 작정이었어요. 로자와 리프크네히트의 기념비가 있는 란트베어 운하를 따라서 걷거나 호숫가에서 오리와 백조 구경을 하다가 한 바퀴 널찍하게 돌아 산책을 하고 중심가로 나갈 셈이었죠.나는 부근의 임비스에서 소세지를 넣은 빵으로 값싼 점심 요기를 하곤 했거든요. 처음에는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느낌이던 기념 동판도 이제는 거리의 간판들처럼 늘 거기 있는 글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군국주의와 전쟁,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 증언자인 이들은 정치적으로 살해 당했다. 인간에 대한 폭력과 잔학 행위는 인간의 힘을 비인간화 한다. 이는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그들을 살해했던 부르조아 정당의 정부에서 세워준 기념물이었지요. 운하 위로 건너는 무지개 모양의 철교를 건너서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거의 인적이 없는 숲에 이르게 되었어요.

하여튼 지하철에서 무슨 일이 생겼겠어요. 베를린에서 시내 철도는 검표원도 출찰구도 없어요. 그런데도 누구나 패스를 갖고 다니거나 표를 꼭 사야만 합니다. 표를 안사도 되는 줄 알고 함부로 전철을 타고 다니다가 불시에 올라오는 검표원 일행에게 걸리면 망신을 당하고 이제까지의 무임승차를 계산하여 엄청난 벌금을 내야만 하거든요.

나는 학생이니까 패스를 갖고 있었지요. 할인이 되니까 우리에게는 그게 훨씬 유리해요. 언제나 백에 넣고 다녔는데 한번도 검표에 걸려본 적이 없어서 내가 패스를 갖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유학생 동료들이 몇번이나 주의를 주고 자기들이 망신 당한 경험담을 들려 주어서 경각심은 갖고 있었어요. 밖으로 나왔다가도 아참, 내 전철 패스, 하고 화들짝 놀라서 집으로 뛰어 돌아갈 정도였어요. 베를리너 스트라세에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네 사람이나 올라타는 거예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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