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의약분업은 '입에 쓴 良藥'

  • 입력 1999년 12월 2일 19시 47분


독일 영화 ‘노킹 온 해븐스 도어’는 암 말기의 두 청년이 벤츠를 훔쳐타고 바다를 향해 떠나는 ‘마지막 여정(旅情)’을 담았다.

한 청년이 차 속에서 발작하자 다른 청년이 약을 구하려고 급히 약국으로 뛰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약사가 청년에게 처방전 없이는 약을 못 준다고 딱 잘라 말하자 청년은 권총으로 약사를 위협해 약을 타낸다.

한국에서는 약사가 약을 못팔겠다고 거절하는 것이 낯설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의약분업이 철저히 시행되고 있기 때문.

미국에서 약사가 의사의 처방전대로 약을 조제하지 않아 약화(藥禍) 사고를 내면 면허가 정지되는 것은 물론 막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실수로 용량을 잘못 투여했더라도 마찬가지다.

95년 미국 일리노이주 K마트약국 약사가 처방전에 나온 2㎎ 짜리 협심증 약 대신 5㎎짜리를 병에 넣어 판매했다가 환자가 1년 만에 숨졌다. 쿡카운티 법원은 약사에게 무려 81만달러(약 9억4000만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네바다주에선 약사에게 약화사고로 숨진 환자 가족의 정신적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도 나왔다.

이형석변호사는 “최근까지 미국 판례는 처방전과 다른 약을 조제하거나 용량을 어겼을 때 책임을 물었으나 최근 약사가 환자에게 부작용을 알리지 않았을 때도 책임을 지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의약분업은 약의 오남용(誤濫用)을 방지하기 위한 의사와 약사 간 ‘견제와 균형의 제도’로 불리지만 실제로 약사보다는 의사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진다.

의료전문 변호사인 신현호변호사는 “미국에는 한국처럼 전문 및 일반의약품의 분류가 없고 슈퍼마켓에서 팔 수 있는 비처방약(OTC)를 제외한 모든 약은 주약사(州藥事)위원회의 심의가 없는 한 의사가 처방해야 약사가 조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1820년 표준약품 일람표인 ‘미국약전’이 만들어졌고 1951년 연방 식품의약품법의 수정법인 ‘듀람 험프리 수정법’이 제정되면서 의약분업이 시작됐다.

의약분업 시행 이후 약사들이 처방약의 값을 깎기 시작했으며 할인 약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약국의 면적이 점점 넓어지고 비처방약들을 팔기 시작했고 화장품 식품 등이 약국에 들어오면서 약국이 되레 슈퍼마켓의 ‘부속매점’이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최근엔 약사들 사이에서 ‘환자 상담’과 ‘투약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일부 주(州)에서는 특정한 영역에서 약사의 처방권을 인정해주고 있지만 의사 중심 의약분업의 큰 틀은 아직 요지부동이다. 대신 슈퍼마켓에서 파는 비처방약의 범위는 점차 확대되는 추세.

미국에선 연방법을 기틀로 해 주(州)마다 다른 ‘의료사업법’ ‘의료사업전문직법’이 의약분업의 구체적 규정을 담고 있다.

세계의 의료전문가들이 연구 모델로 삼는 캘리포니아주 의료사업전문직법은 미국 의약분업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주법(州法). 9조 ‘약업’ 조항은 A4용지로 무려 160여 페이지에 걸쳐 약의 처방과 조제 등에 대해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 여기엔 처방전의 구체적 내용까지 담아 혹시 생길지 모를 분란의 소지를 차단했다.

이 법에 따르면 ‘주 약사(藥事)위원회’가 약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고 조제 처방 등을 관리 감독한다. 위원회는 사법권한도 있고 중죄에 해당하면 영장 없이도 체포할 수 있다.

이 법에서도 의사의 권한은 폭넓게 인정된다. 의사는 환자에게 처방할 뿐만 아니라 약을 투여할 수도 있다. 약사는 주 약사위원회에서 정한 범위 내에서 대체조제할 수 있지만 의사가 처방전에 ‘대체조제 불가’라고 적어놓으면 절대로 못한다.

의사가 병원에서 약국을 운영할 수는 없다. 병원의 약국은 입원환자나 응급환자를 위한 곳이고 24시간 약사가 대기하며 환자를 본다.

이 법에 따르면 불법조제한 약사는 물론 일반인이 처방전을 위조한 때나 약을 사기 위해 의사에게 신분이나 증세를 속였을 때도 형사처벌을 받는다. 즉 성기능이 멀쩡한데도 발기부전이라고 속여 비아그라를 처방받고 약국에서 사면 1년 이하의 징역을 살 수 있다.

한국의 보건복지부와 시민단체 등에선 미국의 입법사례를 그대로 따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먼저 서양과 동양은 약을 처방해온 배경이 현격히 다르다는 이유를 댄다. 서양에선 중세 때 대학을 나온 고급의사가 신분이 낮은 의사에게 처방전을 써주던 것이 의약분업의 뿌리라는 것이다.

반면 동양의학에선 한의사가 곧 한약사인 것처럼 약의 처방과 조제가 구분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약사가 수십년 동안 진단과 조제를 맡았기 때문에 의약분업 실시에 따라 의사가 약사의 영역을 빼앗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해방 후 우리 의료시스템이 미국 시스템을 모델로 삼고 있다며 의약분업도 여기에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의료전문 최재찬변호사는 “보건복지부에선 의사에게 조제를 못하도록 하는 대신 처방료를 받게 해 수익을 보전하도록 했으나 처방료는 되레 불필요한 처방을 유발해 약의 오남용을 막는다는 취지에 역행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처방료 대신 진료비를 현실화해 충분히 상담을 유도하고 약의 오남용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에선 진료비가 20∼70달러.

의사 6만명, 약사 4만명의 현실이 완전한 의약분업을 가로막는다는 주장도 있다. 의사들은 의약분업이 성공하려면 약사가 의사의 5분의1, 즉 1만여명 정도가 적정 수준이라고 말한다. 이변호사는 “98년말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약사의 84%가 약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웃 일본의 40%보다 두 배 이상 많다”면서 “약사도 점차 연구개발 유통 등으로 유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성주기자〉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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