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향기]김명인 ‘의자’

  • 입력 1999년 11월 16일 19시 58분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 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의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이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받들고싶어질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 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내 어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힘겹게 흔들린다

―시집‘길의 침묵’(문학과 지성사)에서

가을이다. 볕 좋은 곳에 의자 하나를 내놓고 앉아 한 나절쯤만 쉬고 싶다. 그런 마음 탓일까.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라고 권하는 시인의 말이 꼭 내게 하는 말 같다. ‘온 다리가 휘청이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시인은 창조자다. 그에게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 마음이 일렁이는 대답을 듣고 싶다.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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