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제균/正論과 官製언론

  • 입력 1999년 11월 1일 19시 07분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미 정부의 통제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언론들이 대통령과 권력의 언론통제라는 이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고 정부측 주장을 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이에 한나라당은 IPI(국제언론인협회) WAN(세계신문협회) IFJ(국제기자연맹) 등 국제사회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요청합니다.”

지난달 31일 한나라당 하순봉(河舜鳳)사무총장 명의로 국제언론단체에 발송된 이 서한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은 이미 ‘관제(官製)언론’이 돼버렸다는 것.따라서 ‘관제언론’이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니 ‘권위있는’ 국제언론단체들이 진상규명에 나서 달라는 게 이 서한의 골자다.

그러나 기자들,심지어 한나라당 출입기자들 중에서도 이같은 서한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서한 내용대로 한국의 언론이 ‘관제언론’이라면 이른바 ‘언론대책문건’ 파문이 그렇게 대대적으로,또 심층적으로 보도될 수 있을까.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의 폭로를 크게 다룰 때는 ‘정론(正論)’이고,정의원과 문건제보자의 금전수수 등 한나라당에 불리한 내용을 보도할 때는 ‘관제언론’이라는 한나라당식 논리는 누구에게도 공감을 얻기 힘들다.1일 한나라당 총재단회의에서조차 “서한을 보낸 것은 경솔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수세(守勢)에 몰리니까 외세(外勢)의 지원을 요청한 듯한 인상을 준다”고 불만을 표시했다.정치권 일각에서는 이회창(李會昌)총재의 방미 중 ‘명령경제’ 운운하며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린 언행과 연결짓는 시각도 나온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본질’을 중시한다면 적어도 이번 사건의 본질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뒤에도 언론이 ‘왜곡보도’를 할 경우 국제언론단체에 서한을 보내는 게 맞는 수순이 아닐까.

박제균<정치부>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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