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지금은 고문이 없는가

  • 입력 1999년 10월 29일 18시 56분


독일의 한 작은 도시 뷔르츠부르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형벌 박물관’이 있다. 중세기 이후 인간이 사용한 갖가지 고문 기구가 즐비하게 전시되어 인간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잔인할 수 있었던가를 웅변해 준다. 어디 독일뿐이었으랴. 중동 대부분의 나라들이 특히 유명한데 이 독재국가들에서는 80년대까지만 해도 고문당한 사람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 한 절대로 석방하지 않았다.

▼스탈린시대 악명높아▼

오늘날 인권국가로 칭송받는 서구 선진민주국가들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나라는 크건 작건간에 고문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악명 높은 쪽으로 대표적인 국가가 옛 소련이었다. ‘체카(Cheka)’ ‘게페우(GPU)’ ‘KGB’ 등으로 이름이 그때 그때 바뀌었으나 기본적으로 비밀경찰인 이 초법적 기구들은 무고한 시민에 대해 고문을 자행하면서 공포로 소비에트 체제를 유지했던 것이다. 아니 미라에 대해서조차 고문을 가했다는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영국의 세계적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 지하에 안치된 미라를 놓고 이것이 과연 몇백년 전의 미라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때 한 험상궂은 사나이가 재빨리 현장을 다녀오더니 252년이 됐다고 말했다.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물었더니 고문을 하니까 실토하더라고 대답했다. 그 사나이는 소련의 KGB 요원이었다.”

고문이 극적으로 드러났던 때는 스탈린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1930년대 후반의 세 차례에 걸쳐 있었던 숙청 재판의 경우였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톰스키 등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수십명이 모두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해 소련을 전복시키려 했다는 조작된 음모 아래 법정에 섰다. 이들은 하나같이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던 탓에 허위자백하고 말았으며 조금이라도 진실을 밝히면 그 자리에서 끌려나가 다시 고문을 받은 뒤 시인하곤 했다.

고문 전문가로 소비에트 권력의 정상부에까지 진출했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악명높은 베리야였다. 그는 ‘무제한의 잔인’이 비밀경찰의 신조라고 믿었으며 그렇게 가르쳤다. 거물급 인사의 경우엔 자신이 고문을 맡았다. 극동군사령관 블릴류케르 원수의 경우 왼쪽 눈알이 빠져나올 때까지 고문했는데, 이때 자신이 왜 이렇게 가혹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스탈린 대원수여! 이 자들이 저에게 가하는 악형을 보고받으셨습니까”라고 울부짖다가 죽고 말았다. 현장에 있었던 장군의 부인은 뒷날 “베리야는 고문당하는 사람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보기를즐겼다.그는분명히 가학증 환자였다”고 회고한다.

▼죄상-배후규명 철저히▼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수사관의 요구에 맞게 허위자백하기도 하고 때로는 동지들을 팔아먹기도 한다. 석방된 뒤에도 겁에 질려 수사기관의 끄나풀이 되거나 적극적 협조자가 되기도 한다. 한말의 선각자로 이름 높던 윤치호(尹致昊)가 결정적으로 친일의 길에 들어선 것은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당하고 석방된 뒤였음이 그 한 보기이다. 고문은 이처럼 고문당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문은 고문을 가하는 사람의 인격도 파괴한다. 멀쩡한 사람이 제 정신으로 남을 고문할 수 있겠는가. 그는 저승사자 또는 악마의 화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고문의 비인간성이 있는 것이며, 어떤 명분 아래서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얼마전에 영국이 마침내 아르헨티나의 철권통치자로 수많은 국민을 고문했거나 죽였던 피노체트를 스페인법정에 서게 조처한 것은 인권수호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고문에 가담했던 수사관들에게 실형이 떨어지더니 ‘전기고문 전문가’ 이근안(李根安)전경기도경대공분실장이 11년 가까운 도피생활 끝에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그 죄상과 배후가 철저하게 밝혀져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묻게 된다. 지금은 고문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는가. 지난날 고문의 대가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그대로 활보하고 있지는 않은가. 국가권력에 의한 부당한 폭력의 행사는 없는가. 진정으로 ‘고문의 시대’를 마감하려면 이 물음들을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고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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