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세중/로버트 김의 애타는 호소

  • 입력 1999년 10월 13일 19시 34분


‘제가 대한민국의 스파이였습니까? 아니였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왜 대한민국 정부는 침묵만 하고 있습니까? 정부의 체면만 중요하고 저의 인권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한국 정부의 정보수집을 도운 스파이 혐의로 유죄판결이 확정돼 미국 교도소에서 복역중인 로버트 김이 대한민국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는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연방대법원이 이달 초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징역 9년에 보호감찰 3년이 확정된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알렌우드 교도소에 면회온 부인을 통해 이같은 서한을 한국 정부에 발송한 것이다.

로버트 김 사건은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한미 양국의 외교 관계가 걸린 만큼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정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되고 냉철한 이성과 법논리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먼저 로버트 김이 간첩죄의 적용을 받은 것이 옳았느냐 하는 이의(異義)를 제기하고 싶다. 로버트 김이 국방기밀 문건을 일반 미국 시민에게 유출했다면 그는 단순히 기밀 누설죄로 3년 이하의 징역만 살고 벌써 풀려 나왔어야 한다. 그에게 간첩죄가 추가되어 중형이 내려진 것은 국방기밀 문건을 외국(한국)의 정보장교가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정보가 미국의 안보를 위해(危害)하는 국방기밀이라는 것이 미국이 기소를 해서 유죄판결을 내린 논리다.

미국은 여기서 한국이 어떤 관계에 있는 나라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전에서 공산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장병을 보내 피를 흘렸다. 또 한국은 월남전 등 미국이 개입된 여러 전쟁에 파병을 하며 협조를 아끼지 않은 50년 혈맹관계의 우방이다.

로버트 김이 한국 정보장교에게 넘긴 문건은 미국과 한국의 공동의 적이라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대부분이다. 그것도 당시 미국 관리들의 말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요구했더라면 한국 정부에 넘겨줄 수도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과연 이 정도의 정보를 혈맹인 한국에 넘겨준 것이 미국의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한 나라의 안보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똑같은 정보라도 넘겨 받은 나라가 우방이냐 적국이냐에 따라서 미국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천지차이다. 미국의 검찰이나 법관은 미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판단하겠지만 세계 평화를 책임 맡은 나라로서 오랜 혈맹 관계를 고려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로버트 김이 미국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나서기 어렵다는 논리를 펴고 있으나 ‘인권’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우리도 미국의 시민권자에 대하여 애기할 수 있다고 본다. 인권문제는 국경을 초월하여 다룬다는 것이 미국의 일관된 입장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과거에 인권을 이유로 우리 국내의 문제에 많이 간여하지 않았는가. 중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중형을 받고 있다면 두 나라가 적극 나서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모두 인권국가를 자처하고 있는 나라 아닌가.

로버트 김의 행위가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만한 국가기밀을 누설한 것이 아니다. 또 통상의 간첩과 달리 금전이나 물질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밝혀진 사안인데 비하여 9년의 징역형은 너무나 과중하다. 실제 범법행위에 비하여 형량이 지나치게 과중한 것은 인권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정부도 좀더 적극적으로 미국 정부와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한국 정부나 국민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비슷한 사건인 죠나단 폴라드 사건에 이스라엘 정부나 국민이 보이고 있는 관심은 우리와 참으로 큰 차이가 있다. 세계화 시대라고 해서 민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일수록 세계에 살고 있는 한국 동포의 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배타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형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류애를 논하고 세계평화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세중(변호사·로버트김 구명위원회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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