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이인길/경제정책의 착시현상

  • 입력 1999년 10월 13일 18시 50분


주가가 연 며칠 폭락한 끝에 44포인트 가까이 폭등한 6일 오후 이기호(李起浩)대통령경제수석은 청와대 기자실에 짤막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내용은 주식시장에 관한 것이고 요지는 대략 이렇다.

‘국내총생산(GDP)성장률 국제수지 금리안정 대우문제의 조속한 처리로 금융시장은 곧 호전될 것이며 주식시장이 동요할 이유가 없다. 투신사 등 몇가지 현안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동요가 있는 것 같으나 사실 지금이 주식투자의 적기다.’

외국 같으면 자리를 내놓고 당장 소송사태를 불러왔을 법한 얘기지만 다분히 의도된 당국자의 발언치고는 시장의 반응이 의외였다.옛날 같으면 정책당국자의 이런 말 한마디가 나오기 무섭게 시장은 기름에 불을 댕긴듯 들끓고 주가가 며칠은 내리 상한가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냉담했다. 이수석이 자료를 뿌린 다음날 종합주가지수는 15포인트로 오름폭이 줄었고 그나마 그 다음날은 내림세로 돌아섰다. 15포인트의 상승도 경제수석의 발언과는 아무 상관없는 움직임이었다. 경제팀의 주축인 강봉균(康奉均)재정경제부장관과 이수석의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고 시쳇말로 복창터질 일이겠지만 기자가 보기엔 이상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주체들이 정부의 정책방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의 구성원들은 이제 정부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핵심을 비켜가는 정부의 얄팍한 계산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간파하고 있다. 그러니 정부가 아무리 강력한 시장대책을 내놔도 한순간 반짝할 뿐 약발이 잘 안미치는 것이다.

반전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봉균경제팀이 생각만 똑바로 했다면 사태를 지금처럼 그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이 점에서 대우사태는 천재일우의 찬스였다. 대우채권의 해법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 강봉균경제팀은 시장안정 논리를 내세우며 돈을 푸는 유동성 대책으로 승부를 걸었지만 그게 바로 오판이었다. 돈은 돈대로 깨지면서 불안심리가 갈수록 더 커지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11월 금융대란설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정부가 대우의 무보증채권 19조원 해결방식으로 50(당장)―80(11월)―95%(내년 2월)의 황당한 환매비율을 들고 나왔을 때부터 화근은 잉태해 있었다.

‘환매가 몰릴 때 내돈을 찾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투자자가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천신만고끝에 11월을 넘기고 나면 그 다음엔 ‘2월 대란설’이 나오게 되어있다. 그게 돈시장의 생리다.대우의 부실채권을 정공법으로 다뤘다면 개인투자자는 생돈을 날리고 증권사와 투신사는 엄청난 손실을 안았을 것이고, 주가는 폭락하고 투자자는 아우성을 치고 세상이 난리를 쳤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지수는 한 700이나 800 언저리에서 바닥을 쳤을 것이고 부유한 투자자의 수익률은 글쎄 12%쯤으로 손해를 봤을까. 그 이상 더 잃을 게 무엇이 있는가.

그러나 정부는 결국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나머지 이를 우회했다. 그 비용을 이제 전국민이 다 짊어져야 한다. 타이밍을 한번 놓치는 바람에 앞으로 30조원을 쏟아부어도 모자라게 생겼다.

그뿐만 아니다. 외환은행과 조흥은행의 해외 DR발행이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무기한 연기됐고 막대한 공적자금(세금)을 투입해 부자의 배를 불린다는 비판을 정부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강봉균경제팀은 여기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져야 한다. 불협화음이니 파워게임이니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팀 전체가 각개약진식으로 지리멸렬하고 현안에 대한 현실인식과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더 문제다. 그의 독선과 오만이 경제를 벼랑끝으로 몰고 있다.

이인길<경제부장>kung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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