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손봉숙/東티모르 파병과 한국위상

  • 입력 1999년 9월 15일 19시 40분


74년 포르투갈이 식민주의를 포기하면서 400년만에 독립할 기회를 맞았던 동티모르는 이듬해 이웃 인도네시아의 무력침공을 받았고 76년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됐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무력으로 점령할 때 강대국들은 냉전구조와 자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모두 눈을 감았다. 대량학살에도 아랑곳없이 주변 강대국들은 자국의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고 일부 나라들은 인도네시아의 불법 침략에 사용될 무기까지 팔았다. 강대국의 묵시적 승인하에 강점행위가 지속됐다.

▼민주적 절차 거쳐야▼

동티모르인들의 생명과 인권은 인도네시아의 군화에 무참히 짓밟혀 24년동안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만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는 고통의 세월을 살았다.

냉전시대의 종말, 인도네시아 장기집권 독재자 수하르토의 몰락, 뒤이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는 동티모르인들이 자결권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부여했다. 5월 5일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정부, 그리고 유엔사무총장은 뉴욕협약을 통과시켰다. 이 협약의 골자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제시한 ‘자치’와 이를 거부하는 ‘독립’을 놓고 동티모르 주민들의 의사를 묻는 투표를 유엔이 관장하고 인도네시아가 그 결과를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유엔이 주관하는 주민투표는 치안상태가 불안정한 가운데도 불구하고 45만명이 넘는 유권자가 등록을 마쳤고 등록된 유권자의 절대다수인 98.6%가 투표에 참여했다.

개표결과 78.5%라는 압도적인 다수가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표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인도네시아 군경의 지원과 사주를 받아온 민병대들이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보복 학살하고 방화와 파괴를 자행해 동티모르는 지금 ‘인종말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사태를 두고 일각에서는 보복살인이 처음부터 예견됐던 만큼 유엔이 애초에 평화유지군을 대동하고 들어갔더라면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유엔의 무책임을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평화유지군을 상주시키자고 했다면 뉴욕협약은 이루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상보다 사태가 악화되고 국제적 압력과 경제제재의 위협에 못이겨 인도네시아 정부도 드디어 백기를 들었다.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안이 수용된 것은 늦었지만 매우 다행한 일이며 지금까지 전세계 20여개국이 파병 용의를 표명했다. 김대중대통령이 파병의사를 밝힌 것은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다.

전투병력을 주축으로 파견하는 안보다는 주민들에게 직접 도움이 될 문자그대로 ‘평화유지군’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본다. 구체적인 방안은 민주적 합의형성 과정과 조정을 거쳐 마련하되 적시에 파병할 수 있도록 하루 속히 좋은 결정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외교강국 도약 기회▼

동티모르 주민투표는 민주적이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치러진 것인 만큼 그들의 의사는 반드시 존중돼야 한다. 자주독립을 눈앞에 둔 동티모르인들이 대량학살 당하는데도 국제사회가 외면하거나 우물쭈물하고만 있다면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적 신뢰는 구호에 그친 속임수로 취급되고 말 것이다.

이웃 나라들은 군인정치의 종식, 부정을 저지른 전직대통령에 대한 처벌 등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성취한 민주주의를 부러워하고 있다. 김대중대통령은 민주적 지도자, 인권을 존중하는 대통령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져 있다. 한국의 파병 문제는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나라에 걸맞은 의연한 모습과 민주적 결정과정을 통해 신중하되 신속하고 효과적인 파병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식민주의의 피해를 직접 보았고 유엔감시하에 치러진 선거를 통해 나라를 세운 점에서 동티모르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새 나라를 세우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전쟁이후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원조와 도움을 받으면서 어려운 고비들을 이겨낸 나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와 경험을 살려 작고 힘없는 나라들도 배려하고 도우면서 다가올 새 천년대를 내다보고 새로운 평화의 길과 공존의 지혜를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파견결정이 한국이 보편적 세계가치―인권 민주주의 비폭력 비살상―의 구현에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교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손봉숙<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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