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광희/일장기 말소사건 재조명 할때

  • 입력 1999년 9월 8일 19시 24분


말 한마디가 수많은 영상보다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한장의 사진이 현란한 언어들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석간 제2면에 실린 한장의 사진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압도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말미암아 일파만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

사진은 아래 위 흰 트레이닝복 차림의 손기정 선수가 월계관을 쓰고 있는 평범한 것이었고 그것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이 있은 지 16일이 지난 시점에서 취급된 사진이었다.

‘영예의 우리 손(孫)군:머리엔 월계관 두 손엔 월계수의 화분. 마라손 우승자(優勝者) 우리 용사(勇士) 손기정군(孫基禎君).’ 이것이 그 사진 캡션의 전부였다. 문제는 원화에 있던 일장기가 감쪽같이 없어진 점이다. 체육부 이길용(李吉用)기자가 주간지 아사히스포츠에서 잘라낸 사진을 조사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화백에게 넘기면서 묘한 제스처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사안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제작 과정에서 충분히 체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손기정의 가슴에 선명하게 찍혀있던 일장기는 신문이 나올 때는 지워진 채였다. 이심전심이랄까, 신문 제작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실수(?)가 저질러진 것이다. 경찰의 신문 과정에서도 끝내 주동자가 확연히 가려지지 않았던 것이 이 사건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동아일보 사시(社是)가 상징하듯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은 3000만 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이었고 동아일보는 그 뜻에 따랐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의 추이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불을 보듯 훤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발안자인 이길용 기자는 물론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잡지부장 최승만(崔承萬) 등 8명이 구속되고 40일간의 문초끝에 이길용 현진건 최승만 신낙균(申樂均) 서영호(徐永浩) 등은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풀려났다. 동아일보는 무기정간(8월29일자)에 이어 사장 송진우(宋鎭禹) 부사장 장덕수(張德秀) 주필 김준연(金俊淵)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 영업국장 양원모(梁源模) 사회부장 잡지부장 조사부장 지방부장 등 모두 13명의 제작 핵심이 회사를 떠난 일대 춘사(椿事)로 이 사건은 마무리됐다. 말하자면 신문사가 그대로 풍비박산된 셈이다.

6일 일민(一民)미술관에서 열린 이길용기자 탄생 100주년 및 20세기 한국스포츠 100년 출판기념회는 후학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돼 주었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장기 말소 사건은 스포츠를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형태의 항일이었고 그것은 의외로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문화정책을 표방했던 총독부의 과격한 조치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60여년의 세월과 함께 일장기 말소 사건은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고 이 민족적 유산은 10여년 전부터 유족 차원에서 이길용기념사업회가 명맥을 이어오고 있을 정도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그 동기와 결과에서 보듯이 우리 언론사에 민족 언론의 진면목이 무엇인가를 웅변한 산 교과서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사건 자체를 희화화하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표류하던 민족 정서를 하나로 묶어 분출시킨 대 역사(役事)요, 살신성인의 표본인데도 말이다.

하나의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선인들의 그 정신은 누구보다도 오늘을 사는 언론과 언론인이 기리고 배워야할 덕목이라고 생각된다.

‘과거를 과거라고 해서 외면하는 것은 미래마저 포기하는 것’이라고 처칠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한 재평가와 재조명을 언론계에 촉구하고 싶다.

김광희(전 동아일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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