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국가보안법의 긴 그림자

  • 입력 1999년 8월 23일 18시 50분


검찰이 노동자 축구 ‘남북대결’에서 ‘완패’를 당하고 돌아온 민주노총 간부들을 소환 조사하고 있다. ‘패전’의 경위가 아니라 ‘이적행위’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담당 검사는 기소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안법은 행위 당사자의 생각과 의도가 중요하다.” 국가보안법의 정치적 성격을 똑부러지게 정리한 명언이다.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이 있었으면 처벌하고 그렇지 않으면 별문제 없다는 뜻이다.

정말 궁금하다. 남의 머릿속에 든 ‘생각과 의도’를 어떻게 꿰뚫어 볼까. “당신 북한을 이롭게 하려고 했지, 그렇죠?”라고 물으면 어떤 경우든 대답은 “아니오”다.

순수한 진실 또는 교활한 거짓말이다.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국민의 정부 공안기관은 물고문 전기고문을 하지 않는다는데…. 하지만 걱정마시라. 국가보안법은 ‘행위 당사자의 생각과 의도’가 중요하니까. 여기서 ‘행위 당사자’란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가 아니고 칼자루를 쥔 검찰이다.

검찰이 집어넣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이갑용위원장의 ‘아니오’는 진실이 된다. 검찰이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에 정면 도전할 의사가 없는 한 이번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반북 대결정책으로 선회할 경우 똑같은 ‘아니오’가 거짓이 된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김대중 정부는 출범 이후 1년 동안에만 약 500명의 시민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는데 그중 95%가 ‘고무 찬양’ 혐의였다. 국가보안법의 대표적 피해자가 대통령으로 있는 정부가 저지른 이러한 대량구속 사태는 기괴한 ‘정치적 참극’이라 할 만하다. 만약 남북관계가 악화될 경우 무슨 일이 더 벌어질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다음 문제는 불고지죄.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 상금 타려고 또는 애국심에서 자발적으로 다시 보는 건 좋다. 하지만 이것이 법률적 강제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중에 알고서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은 지체없이 신고해야 한다.

억울하게 신고당한 사람이 그 혐의를 벗으려면 모진 고초를 겪어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불고지죄의 목적지는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게 만드는 사회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더라도 이 두 조항만은 손을 보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늦은 감은 있지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당의 사활이 걸렸다면서 여기에 반대하는 자민련의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에게는 당의 사활이 국민의 인권과 자유보다 더 중요한가? 북한 형법의 존재를 들먹이면서 ‘위험한 발상’과 ‘사회주의 성향’이라는 폭력적 언어로 여당을 공격하는 한나라당의 이회창총재에게도 묻는다.

이총재는 독재의 서슬 퍼렇던 5공화국 시절 대법원에서 간첩죄와 불고지죄로 무더기 구속된 일가족에게 무죄를 선고한 ‘대쪽판사’였으며, 지금은 단순히 ‘법대로’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만들고 고칠 권한을 가진 국회 다수당의 총재다. 야당 총재로서의 정치적 손익계산이 아니라 법률가 이회창의 ‘아름다운 원칙’에 따라 분명하게 말씀해 보시라. 현행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안고 21세기에 들어가는 대한민국이 진짜 민주공화국 맞습니까?

유시민<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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