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日帝징용 한국인 '전범' 생존자 이학래씨

  • 입력 1999년 8월 12일 04시 19분


“일본에 강제징용당한 것 만도 억울한데 전범이라니요.”

한국인 ‘전범’ 이학래씨는 11일 자신이 전무로 있는 도쿄(東京) 도신택시회사 회의실에서 기자와 만나 50여년간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날 만남은 ‘콰이강의 다리’라는 논픽션 소설(한길사)을 통해 한국인 전범 희생자의 실태를 최초로 국내에 알린 소설가 정동주씨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전범은 어떤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까.

“전범은 포로를 학대하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인 ‘전범’은 포로들과 직접 접촉하다보니 포로들이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아 종전후 포로들로부터 지목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포로에게 중노동을 시키고 환자에게 약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됐습니다. 그러나 책임은 그런 처우를 하도록 명령을 내린 일본군 고위 책임자들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상황을 왜 재판과정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연합군측은 극도로 흥분돼 있는 상태였습니다. 연합군은 우리가 강제징용당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처형된 사람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들 간에는 죄질의 차이가 있습니까.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포로가 특별히 지목한 사람, 재수가 없는 사람이 죽어나갔죠. 말 한마디로 생사가 갈렸습니다.”

―이런 억울한 사연을 그동안 외부에 알리지 않았습니까.

“도쿄에서 27명의 무기수가 양심적인 일본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억울하다고 탄원을 했으나 ‘재판 당시 일본인 신분이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55년 일본인들과 함께 가석방됐습니다.”

―석방된 뒤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인들은 ‘사정은 이해하지만 법이 없어 보상을 못 해준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한국정부에 알아보라고 냉정하게 나오더군요. 한국대사관에 알아보니 조약체결 당시 한국인 전범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더군요. 우리는 외롭습니다. ‘전범’이란 딱지로 인해 마치 자발적으로 일본에 협력한 사람들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석방후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전범으로 복역한 사람 10여명이 택시회사를 차려 운영해 왔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며 소송도 진행하고 사망자 명단 작성과 사망사실 통지 등 대외활동도 벌였습니다.”

―일본인 전범에 대해 일본정부는 어떤 대우를 하고 있습니까.

“53년부터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고 다시 몇년 후부터는 군인 군속 보상금을 주고 있습니다.”

〈도쿄〓이병기기자〉watch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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