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중국 공산화]장학량 54년간 가택연금

  • 입력 1999년 7월 25일 20시 02분


시안사건의 두 주역 장제스와 장쉐량은 이 사건으로 모두 깊은 상처를 입었다.

‘피해자’인 장제스는 자신의 시안행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날’ 이후 1년간 침묵을 지키던 그는 37년 회고록에서 뼈속까지 사무치는 회한을 토로했다.

“창졸간에 당한 일로 나라의 중심이 흔들리고 말았다. 뉘 알았으랴, 내가 함정에 빠질 줄…. 나의 주의력 부족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그는 “8년간 들인 공(공산당 소탕작전)이 불과 2주일만에 무너져 버렸다”고 절절한 심경을 토해냈다.

‘가해자’인 장쉐량에게 돌아온 것은 그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난징으로 귀환하는 장제스를 자청해서 따라 온 장쉐량은 군사재판을 받고 10년형과 5년의 공민권 박탈형을 선고받았다.

장제스는 그를 바로 사면하지만 장쉐량을 기다린 것은 가택연금이었다. 가택연금은 무려 58년간 계속됐다. 이 긴 세월을 그는 난(蘭)과 책, 그리고 울분 속에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중국인민들은 그를 서서히 잊어갔다.

항일전에 참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호소도 장제스는 묵살했다.

46년 저우언라이가 장제스에게 그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장제스는 이것도 거절했다.

59년 장제스와 23년만에 재회하면서 눈물을 보인 그는 참회서를 썼다. 이 참회서에서 그는 자신이 일으킨 시안사건을 ‘용서할 수 없는 실수’였다고 후회한다.

“시안사건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구국(救國)이 오국(誤國)이 되고 구민이 해민(害民)이 됐다.”

20만자나 되는 참회서를 쓰느라 그는 오른쪽 눈에 백내장이 생겨 반실명 상태가 되기도 했다.

75년 장제스가 죽고 그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이 됐지만 연금은 계속된다.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은 94년 리덩후이(李登輝)현 총통에 의해서였다.

현재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그는 6월 1일 99세 생일을 맞았다.

중국과 대만 정부는 서로 장쉐량을 모셔오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특히 그가 60여년만에 다시 화청지를 찾아갈 것인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이 ‘중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증인’은 중국과 대만 중 어디로 갈 것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일축한다.

“나는 국민당도, 공산당도 아니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