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66)

  • 입력 1999년 7월 12일 18시 34분


정희에게

나 드디어 서울로 올라가려고 한다. 네가 그동안 보내준 것들은 정말 쓸모가 있었어. 은결이의 아가 옷들은 물론이고 젖꼭지라든가 이유식들도 그랬고 어쩌면 너는 그런 물건들을 찾아낼 수가 있었니? 처음으로 네가 보내준 육아전서를 읽고나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식하고 어리석은 엄마였나를 알았어. 보내준 시집이며 내가 부탁했던 사회과학 책들도 정말 고마웠다. 문득 눈에 띄는 구절이 생각나 적어 둔다.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내일 이야기해 줄게요, 우리가 살아 있다면. 나는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왜 오늘을 내일로 못 만드나요? 지금이 내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다른 구절 하나 더 덧붙인다.

꿈에 와서 보이는 님은 신이 없다 하건마는 깨고나니 달이 떴네 울 밑에 국화 심어 국화 밑에 술 떠 놓고 국화 피자 달이 지네 기왕지사 없는 길을 잠 깨우고 가버릴걸 무삼 일로 찾았던고.

방금 떨리던 나뭇가지의 여운은 날고 있는 새의 가슴 속에 있다. 산 위에 서 있는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떨어져 간 나뭇잎들엔 깃이 닿은 온기가 남아 있다.

그리고 딱딱한 문장으로 바꾸어 적어 본다.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는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품생산의 영역과 여자들에 의한 개별적 가사노동이 행해지는 가족이라는 두 영역으로 분리된다. 가족은 경제영역이 아닌 자연의 영역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면서 다시 개인생활과 공적생활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일과 생활의 분리라는 우리 사회 전체의 소외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그래 어머니에게는 네가 전에 말하던대로 놀라시지 않도록 한 자락 깔아 두었니? 나는 감히 식구들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거야. 공부를 하겠다구 그랬지. 뭐 별다른 이유는 없어. 다만 아이와 둘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할 것 같아서야.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 자세한 말씀은 내가 할테니까 그냥 귀띔만 해드려라. 너는 이담에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서 내가 끼친 불효를 모두 한번에 만회해주기 바래. 아마도 우리가 상경하는 건 일러도 다음 주말이 되어야 가능할거야.

그가 무기형을 받았다는 엽서를 내게 보냈다고 지난번 편지에 썼는데, 유신체제 시절에는 사형을 받고도 버젓이 살아 돌아오지 않았니? 적어도 삼 년 쯤이면 그가 돌아올지도 몰라. 아니면 좀 더 길어질지도. 세계가 두쪽으로 갈라져 있는데 천지개벽이 없는 한 그는 세상 구경을 못하게 될지도 모르고.

윤희 언니

편지 반가웠어. 나두 이맘때 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은결이 돌두 가까워 오고 해서 은근히 마음을 졸였어. 언니의 편지를 받자마자 나는 틈을 보다가 엊그제 토요일에 엄마에게 청을 넣었지. 나 아르바이트해서 돈 좀 받았거든. 전에도 얘기했듯이 시간제 가정교사를 하는데 요새는 보수가 많이 올랐다구.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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