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고원정/대화야말로 强者의 무기 아닌가?

  • 입력 1999년 6월 18일 19시 28분


한번 생각해 보자. 서해 교전의 결과가 거꾸로 나와 우리 함정이 침몰하고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아마 전국이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크고 작은 도시에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잇따라 열렸으리라. 성미가 격한 사람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며 복수를 외쳤을지도 모른다. 김정일의 인형을 만들어놓고 화형식을 가지는 것은 정해진 순서가 아닐 수 없다.

정부와 여당은 빗발치는 야당과 여론의 비난에 어쩔 줄 모를 것이다.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군 수뇌부를 엄중히 문책했을 테고 사재기 열풍이 몰아닥치고 주가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지 않았을까. 금강산 관광이 무엇이고 비료 지원이 다 무엇인가. 그래도 햇볕정책을 주장할 만큼 간 큰 인사가 정부나 정치권에 있을 수 있을까. 당장 전면전이 일어날지 모를 위기가 한반도 전체에 닥쳐왔을 게 틀림없다.

다행하게도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지금 정치인들이 햇볕정책이 어떻고 신북풍이 어떻고 하는 소리를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실상은 모두가 강자의 여유라고 해서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북한이 의외로 소극적 대응에 그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약자의 처지에 있는 탓에 뽑아들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은 탓일 뿐이다. 14분간의 교전은 남북간 국력의 우열을 상징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우월성이 장비와 전투력의 우세로 나타났고 국민들 모두의 자신감이 곧 병사들의 자신감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을 포함한 국민 모두는 우선 군을 향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해야만 한다. 그동안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게만 보이던 우리 군의 대처는 아쉬움이 남는 대로 합격점을 줄 만한 것이었다. 과연 애국심이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던 신세대 병사들의 분투도 믿음직하기만 했다.

그런 고마움과 신뢰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교전을 둘러싼 여러 구설을 이제는 떨쳐버려야 한다. 그것이 숨막히는 긴장의 순간을 견뎌낸 군에 대한 도리이자 원인이야 어쨌든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북한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교전은 끝이 났다. 실속없는 설전 또한 끝을 내고 이제는 정리를 해야 할 때다. 이번 교전이 가지는 의미는 세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는 아무리 햇볕정책이 추진되고 금강산 관광과 차관급 회담으로 상징되는 남북 교류와 대화가 활성화되는 단계에서도 남북간 국지적인 무력충돌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총체적인 국력뿐 아니라 군의 전투력에서도 우리가 상대적인 우위에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우리 군에 대해 신뢰를 가질 수 있게 됐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 세가지 의미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제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남북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대화야말로 강자의 무기이며 강자만이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법이 아닌가. 불의의 돌발사고 때문에 대화의 장을 거둬버리는 것은 강자의 자세가 아니다. 그런 긴장의 와중에서도 북한산 꽃게가 중국을 통해 수입돼 꽃게값의 폭등을 막았다는 보도를 보았다. 남북관계는 이미 이런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우월한 국력이나 군사력은 이런 흐름을 막는 억지력이 아니라 추진력으로 작용돼야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지 않겠는가.

고원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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