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韓銀의 무기력증

  • 입력 1999년 6월 11일 19시 37분


전철환(全哲煥)한국은행총재는 “요즘은 주부들도 총재실로 전화를 걸어 금융통화위원회가 언제 열리는지, 금리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물어올 정도”라며 “이제야 국민이 중앙은행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다”고 흐뭇해 했다. 그는 “앞으로는 중앙은행의 지침에 따라 경제행위를 해야 이익을 보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젊은 직원들은 총재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중앙은행 역할에 회의를 품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최근 한달여 사이에 10여명의 직원이 금융감독원 등으로 직장을 옮겼거나 지원서를 냈다. 한은이 외부공모로 뽑으려 하는 국제국장 특별연구실장 등 요직에는 마땅한 인물이 나서지 않아 마감시한을 계속 늦추고 있다. 교수 출신 금통위원은 대학에 괜찮은 보직이생기자훌훌떠났다.

위상이 높아졌다는데 오려는 사람은 없고 떠나는 사람만 있는 기묘한 상황. 금융권에서는 “이게 한은의 진짜 모습”이라고 꼬집는다. 한은 내부에서는 중앙은행 스스로 축소지향적 독립에 안주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재경부 관리나 청와대 비서관이 금리에 관해 언급하면 한은 간부는 “누구나 의견은 낼 수 있는 것”이라며 애써 대범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정작 문제가 있어 보이는 정부정책에서는 눈을 돌린다. ‘무엇을 위한 한은 독립이냐’는 소리가 한은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경험했듯이 제 목소리를 내는 중앙은행의 존재는 우리 경제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12일로 창립 49주년을 맞은 한은이 진정 국민곁에 가까이 다가서려면 상층부부터 무기력증과 소심증을 떨궈내야 하지 않을까.

박원재<경제부>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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