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39)

  • 입력 1999년 6월 10일 19시 27분


그래서 여름이 끝나기 전에 여길 떠날 거라구 했어요? 응? 말해 봐. 아까 나는 땅 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나는 윤희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채 가만히 기다렸다. 윤희의 입술이 내 머리카락 사이를 헤치고 정수박이에서 관자놀이를 지나 뺨으로 내려왔다.

나는 신문을 보면서 이번에 현우씨와 헤어지면 아주 오래 못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어째서 여름이야. 눈 오는 겨울을 지나고 새 봄이 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요. 나 직장두 그만 두구 더 깊은 산골을 찾아갈 수도 있어요.

다 잡혀갔는데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내가 나타나야 다른 사람들도 편해질 거야.

당신이 들어가구나면 나두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가만있지 않으면….

어디선가 숨어서 일하는 이들을 찾아낼 거야. 그래서 군사독재하구 싸워야 하겠지.

벌써 그렇게 하구 있잖아.

아니…좀 더 기다려 봐요. 정치적 상황이 바뀔지두 몰라.

윤희는 나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한 그날부터 말수가 적어졌다. 그리고 가끔 읍내에 나가면 풋사과를 사다 달라고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네는 그 무렵에 이미 은결이를 가졌을 것이다. 바보 같이,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네가 신경이 예민해진 것은 내게 닥친 위험과 곁에 잡아두고 싶은 심리 사이의 갈등 때문이라고만 편리하게 생각했다. 아, 이 여자는 나를 지금 꼭 붙잡아 두고 싶구나. 전에 윤희는 그렇기는커녕 그림쟁이답게 독립적이고 자아가 강해서 절대로 속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돌이켜보면 그때 윤희는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네가 새 봄까지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은결이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다시 그네가 갈뫼에 남긴 내 젊은 날의 표정을 본다. 처음에는 나 혼자였던 화폭 안에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윤희가 스스로 그려 넣은 자신의 얼굴이 내 뒷전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에는 짙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뺨이 패어 여윈 얼굴은 당시의 고뇌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 등 뒤에는 말라붙은 피와 같은 암홍색 배경이 칙칙하게 드리워져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나를 둘러싼 세계였을 것이다. 그 어두운 붉은 색 위로 코발트의 투명한 붓자국이 세로로 그어지고 있는데 음울하고 지쳐있는듯한 내 초상이 그나마 젊다는 느낌을 주는 건 아마도 그 투명한 푸른 붓자국 때문이리라. 초상을 그리던 칠월 중순에서 팔월 초까지 우리는 그전 몇 달 동안의 나른한 아늑함과는 정반대로 긴장된 침묵의 시간이 많았지만 그네와 나는 은연중에 우리 사이가 매우 깊어졌음을 알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윤희의 저 묘한 미소를 발견했다. 아주 웃는 표정은 아니고 희미하게 머금기만 했는데 어찌 보면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치 ‘잘 있었니?’ 하면서 등장하는 꿈 속의 엄마 같은. 그래 이제 생각해 보면 그네는 혼자서 나를 바라본 게 아니었어. 아가와 함께 나를 건너다 보고 있었다.

먼저 그림에 있던 오른쪽 방 문의 격자창은 사라지고 조금 뒤편에 윤희가 떠올라 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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