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28)

  • 입력 1999년 5월 28일 19시 21분


모래밭에 풍로를 놓고 번개탄에 불을 붙여서 숯을 얼기설기 얹고는 들통에 잿물 넣고 큰 빨래 작은 빨래들을 채곡채곡 쟁여서 불 위에 올려 삶는 거예요. 이런 빨래 아마도 우리 또래에선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해봤을 걸요. 세탁기에 돌리는 빨래란 얼마나 싱거운지. 빨래를 삶으며 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물 속에서는 송사리들이 떼로 몰려와 겁도 없이 발가락이나 종아리의 피부에 붙은 소금기 따위를 쪼으려는지 뾰족이 내민 주둥이로 살갗을 간지럽히죠. 모래 위에 드문 드문 자라난 쇠뜨기나 강아지풀 사이에서 까치밥을 골라 줄기를 잡아 뽑으면 하얀 뿌리가 나오는데 달착지근한 맛이 나요. 아니면 뱀딸기도 찾아내고 까마중도 골라내며.

당신은 그맘때쯤 지렁이를 두 바늘에 꿰어 물 속에 던져 놓고 집중해서 찌를 들여다보고 있겠지요. 당신이 뭔가 반짝이는 걸 낚아 올릴 때 나는 그게 피라미 새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먼발치에서도 알지요. 당신이 아무 소리 없이 낚시에서 떼어 내어 고기망에 넣으니까요. 어쩌다 붕어 비슷한 참붕어 한 마리 낚아 올리면 당신은 법석을 떨지요. 나중에 보면 겨우 손바닥만한 것이지만.

와아, 크다 커. 힘 좋은데.

어쩌구 하는 당신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도 나는 대개는 모른 척 하지요. 빨래가 다 삶아지면 나는 그것들을 꺼내어 다시 한번 물에 헹구고 함지에 담고는 당신을 부릅니다.

인제 우리 밥 먹자아.

가만 있어 봐. 고기가 오기 시작했다구.

나 배고파. 혼자 다 먹는다아.

하면 당신은 못이기는체 하고 낚시 도구를 챙겨 이쪽으로 건너옵니다. 당신은 나에게 고기망을 벌려서 자랑스럽게 보여 주지요.

이건 피리들이구… 나뭇가지에 꿰어서 소금 뿌려 구워 먹으면 아주 담백하구 맛있다구. 참붕어, 크지? 이건 꾹저구라구 못생겼지? 자 봐, 납자루도 한 마리 잡았어. 하지만 이놈은 놓아 주자.

왜 그래요, 제일 먹음직하게 생겼구만.

이건 요즘 드문 물고기야. 꼭 바다의 병어처럼 생겼잖아.

파닥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아쉬운 듯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당신은 물 가운데로 휙 던져요.

자, 그럼 밥을 먹어 볼까?

아직 안돼요. 날 도와 줘야지.

내가 물이 줄줄 흐르는 홑청의 한쪽을 잡고 내밀면 당신은 군말 없이 고분고분 다른 한쪽을 마주 잡아 주어요. 그리고 물기 한방울 없이 힘껏 꼭 짜내지요. 다시 홑청을 펼쳐서 서로 양끝을 마주잡고 만세를 부르듯이 위로 쳐올렸다가 뿌리치며 내리면 남은 물기가 말끔하게 빠지던 거였어요. 우리는 길다란 천을 자갈밭 위에다 펼쳐 놓지요. 그러면 하얀 햇볕이 홑청 위에 가득찹니다. 고만고만한 베갯잇도 방석덮개도 사이좋게 나란히 펼쳐 두지요. 속옷들은 널찍한 바위 위에 널어 두는데 바위가 햇볕에 뜨뜻미지근해서 저절로 잘 말라요. 우리는 빨래들에게 좋은 자리는 다 내주고 모래밭으로 올라가 비닐 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었지요. 아무 일도 없는 것같은 살림의 단순한 일상이란 얼마나 살맛나는 시간인지.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수천년을 지탱해 왔잖아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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