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03)

  • 입력 1999년 4월 29일 19시 28분


반찬은 냄비에 이것 저것 넣고 끓인 찌개와 사장 집에서 내온 김치가 전부다. 톱밥이 하얗게 덮인 작업대 위에 신문지를 깔아 놓고 찌개 냄비를 중심으로 몰려 선채로 땀을 흘리며 밥을 먹었다. 나는 공장 생활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다른 잡념이 별로 없었다. 작업에도 차츰 자신이 붙었다. 박 형 말로는 보통 견습이 떨어지려면 적어도 육 개월은 걸린다는데 나처럼 진전 속도가 빠르면 한 삼 개월이면 충분하겠다고도 했다. 이 주일쯤 지나서 건이에게 안전 신고를 했다. 전화를 했더니 혜순이가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시라구 전할까요?

나는 목소리를 깔고 입술을 오무려 둔탁하게 발음하려고 애썼다.

김전우라구 합니다.

김…전, 우, 씨요?

혜순이는 이쪽이 오현우인줄 눈치는 못채고 뭔가 미심쩍다는 듯이 간격을 두더니 형 전화 받어 하는 소리가 건너왔다.

전화 바꿨습니다.

나야, 김전우야.

성님이요? 아무 일 없었제?

그럼, 잘 지내구 있다.

고생은 안허요?

나는 최동우의 안부를 묻기로 하였다.

인천 사람은 잘 있겠지?

건이가 동우 얘기인줄 금방 알아 차렸다.

아 그러지라. 인천 형은 성함이 한일군 씨라구 합디다. 헌디 어찌 이렇게 애를 태워쌌소.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씩은 연락을 주셔야지라.

미안하다. 먹구 살기 바빠서 말이야. 그럼 이만….

잠깐 잠깐만요, 일군이 성님이 헤지던 디서 좀 보잡디다.

언제?

내주 초에 연락 주시쇼.

나는 돌아가는 길에 시장에 들를 작정이었다. 박 형은 임 사장과 공단에 납품 들어갔으니 좀 늦을 모양이었다. 퇴근 직전에 임 사장과 함께 트럭을 타고 나가는 박 형에게 내가 저녁 준비를 할터이니 일찍 들어오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던 터였다. 박도 잊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니까. 나는 며칠 전부터 그가 달력의 날짜 위에 붉은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시간의 시장은 온통 퇴근한 여공 아가씨들과 아낙네들로 어깨를 수없이 부딪칠만큼 복잡했다. 삼겹살 세 근 사고, 파 마늘 풋고추 상추를 사고, 된장찌개 거리로 두부 한 모, 호박, 감자를 샀다. 비닐 봉지에 담아 양손에 들고 오다가 시장을 벗어난 번화가쪽에까지 나아가 양과점에 들렀다. 제일 싸고 장식도 덜 요란한 수수한 케이크 하나를 박의 나이 서른 하나에 맞는 초 네 개와 함께 샀다.

오늘 생일 잔치는 우리 집에서 하지 않고 명순씨네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나는 지난 주에 박형과 함께 처음 그 집에 가보았으니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다. 그 며칠 전 일요일에는 박형과 나와 명순과 순옥이 넷이서 영등포 극장까지 나가 영화구경도 하고 저녁도 같이 먹었다. 순옥은 대전 아가씨였는데 몸이 마르고 키가 큰 편이었다. 얼핏 보면 키 크고 멀끔하게 생긴 박과 남매처럼 보였다. 바지를 입은 뒷모습이 시골 아가씨 같지 않았다. 그러나 명순과는 달리 말수가 적어서 약간 답답한 편이었다.

<글 :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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